본문 바로가기

연혁

  • 조선시대 태종(太宗) 13년 : 계림부(鷄林府)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는데 지역은 경주부에 속하였으며,
  • 고종(高宗) 32년 : 전국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 경주군(慶州郡) 서산내면(西山內面)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듬해 광무원년(光武元年, 1896) 13도(道) 제도 시행으로 경주군 산내면으로 개칭됨.
  • 1914년 4월 1일 : 면제실시(面制實施) 행정구역 개편시 경주군 산내면 9개 리동으로, 1943년에는 9개 리동이 분동(分洞) 되어 19개 리동으로 됨.
  • 1995년 1월 1일 : 경주시와 경주군의 통합으로 경주시로 예속
  • 2020년 3월 3일 : 대현3리가 대현3리와 대현4리로 분동되어 20개 리동이 됨
  • 산내면은 가도가도 산이요, 봐도 봐도 하늘뿐인, 말 그대로 '산속의 고을'이다. 천년고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에서 약 26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법정리와 68개의 자연부락, 19개 행정리, 68반으로 전체면적 143.03㎢중 임야면적이 전체의 약 83%를 차지하는 해발200-550m 고지대 산간 지역으로 밤낮의 일교차(5~7℃)가 심한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는 남쪽으로 울산시 상북면과 연접하고, 동남쪽엔 내남면, 서쪽으론 청도군 운문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북안면과 이웃하고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하고 대구시민의 식수원인 운문댐 상류에 위치한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 등 민물고기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유래

  • 의곡1,2리(義谷1,2里)
    • 의곡 : 조선중기에 월성이씨(月城李氏)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도는 미상임. 역(驛)으로 지정되면서 부터 어진 촌장이 나타나 마을을 잘 통솔하였다 하여 의곡(義谷)이라 부르게 되었음.
    • 임동 : 김녕김씨(金寧金氏) 김선룡(金先龍)이란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숲이 덮혀 있었다 하여 임동(林洞) 또는 숲골이라 불리움.
  • 내일1리(乃日1里) 
    • 본내일 : 마을 뒷산에 해가 뜨고 달이 뜬다고 하여 그 산봉우리를 일월봉(日月峰)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을 일월이라 하였는데 승려가 시주하러 왔다가 일월이라 하면 큰 재앙이 닥친다 하면서 내일(乃日)이라 고쳐주어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음.
    • 회평 : 이천서씨(李川徐氏) 가문의 서일범(徐一範, 晦川公)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회천공의 회(晦)자와 마을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하여 평(坪)자를 써서 회평(晦坪)이라 함.
    • 너더리 : 마을 가운데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널판지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하여 판교(板橋), 널다리라고 불렀으나, 그 후 발음이 변하여 너더리라고 불리운다고 함.
  • 내일2리(乃日2里)
    • 소태 :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월성이씨(月城李氏)가 피난와서 개척하였다하며 솥을 만드는 곳이 있어 솔터라고 하였는데 지명표기시 소태(少台)라고 표기되었다고 함.
    • 상목 : 임진왜란 시 유규화(柳圭化)선생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마을 뒷산이 누에같이 생겼다 하여 잠두산(蠶頭山)이라 하였고, 누에는 뽕을 먹어야 잘 산다는 뜻에서 상목(桑木)이라 하였음.
    • 수의동 :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예의를 잘 지키고 온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수의동(守義洞)이라 불리운다고 함.
    • 진목 : 처음 부락을 개척할 때 참나무 숲이 많이 있었다 하여 진목정(眞木亭) 또는 참나무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이곳에는 옛날 참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참나무정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음.
  • 대현1리(大賢1里)
    밀양박씨 경보(慶輔)란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여 회곡이라 칭하였고, 그 후 어진 사람이 9명이 태어났다하여 구현동(九賢洞)으로 불리었음. 그 후 큰 재(고개, 峴)가 많아 대현(大峴)으로 불리우다 일제시 박재연이 이왕이면 고개현(峴)자를 어질현(賢)로 고쳐 대현(大賢)이 됨.
    • 서편 : 동창천 서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편이라 불리움.
    • 범곡 : 월성김씨 호(虎)란 사람이 처음 개척하였다 하며, 이 마을 앞산이 범의 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호곡(虎谷)이라 부르다가 후손에 와서 범이 배가 고프면 살림(재물)이 늘어나지 않는다하여 범곡(凡谷) 또는 범골이라 부름.
    • 고강리 : 개척당시 마을에 고씨(高氏)가 살다 차례로 강씨(姜氏), 이씨(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고강리(高,姜,李)라 칭함.
  • 대현2리(大賢2里)
    • 시다 : 대한(大旱)에도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절후에 맞게 농사가 잘되어 힘 들이지 않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하며 고려유신들이 피난 와서 후사와 평화가 오기를 기다렸다하여 시다(時多)라고 칭함.
    • 태종 : 조선 3대왕(芳遠)이 고려 유신들의 군을 전멸하고 태종왕의 이름을 따서 태종이라 불리움.
    • 동편 : 동창천 동쪽에 있다하여 동편(東片)으로 불리움.
  • 대현3리(大賢3里)
    • 동곡 : 마을의 북쪽 산에 구리(銅)가 나왔다고 하여 동곡(銅谷) 또는 쇠동골이라 칭함.
    • 중리 : 동곡과 와항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리(中里)라 칭함
    • 귀농지 : 196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재임시, 실업자 구재책으로 산 100정(町)을 개간 50세대를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하여 귀농지라 칭함.(C지구)
  • 대현4리(大賢4里)
    • 와항 : 태종 이방원이 고개마다 진지 번호로 일항(一項:외항), 재항(再項:소호)으로 정한 이름이 그대로 불린다고 하고, 마을 형태가 기와처럼 생겼다 하여 와항, 외항만디, 외항, 기와목이라고도 칭함.
    • 귀농지 : 196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재임시, 실업자 구재책으로 산 100정(町)을 개간 50세대를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하여 귀농지라 칭함.(A지구, B지구)
  • 일부1리(日富1里)
    1720년경 밀양박씨 문용(文溶)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이후 12대에 걸쳐 장인(匠人)으로 이어 오면서 상거래가 빈번하여 날마다 한집씩 부자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하여 일부(日富)라 부르게 됨.
    • 심천 : 옹강산에서 신원리에 이르는 골짜기가 깊다하여 지푼내 또는 심천(深川)이라 부르게 됨.
    • 거산 : 골이 좁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 산 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거산이라 부름.
    • 산수 : 마을 가운데 묘가 있었다 하여 산소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산수(山水)라 칭함.
    • 제궁 : 마을에 큰 재실이 있었다 하여 재궁(齋宮)이라 하던 것이 지명 표기시 재궁(才宮)으로 불리움.
  • 일부2리(日富2里)
    • 상신 : 어느 해 홍수가 나서 마을 전체가 떠내려가고 새로운 마을을 일궈 새말이라 하였는데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새마을, 상신(上新)이라 칭함
    • 하신 : 마을 유래는 상신과 같음.
    • 장척 : 괘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일자형으로 긴 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장척 또는 장자골이라 부름.
    • 괘일 : 인근 마을에서 해가 제일 늦게 지므로 '해를 공중에 매달아 넣은 듯하다'하여 괘일이라 부름.
  • 신원1리(新院1里)
    • 덕동 : 개척 당시 마을 위쪽에 절벽이 있고 시내가 흐른다 하여 암계(岩溪)라 부르다 뒤에 덕(德)이 있고 훌륭한 후손이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1618년 김중보라는 사람이 덕동(德洞)이라 개칭함.
    • 옷밭 : 마을 개척 당시 옻나무가 많아 옻밭 또는 칠전(漆田)이라 불리움
    • 박다 : 개척 당시 박달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박달이라 부르다가 그 후 박씨(朴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박다, 박다동으로 불리움.
  • 신원2리(新院2里)
    • 문산 : 마을에 서당이 많아 글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하여 글메라 부르다 문산(文山)이라 칭함.
    • 세원 : 1760년경 남평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인가가 드문 곳에 원(院)을 새로 지었다 하여 새원 또는 신원(新院)이라 칭함.
    • 멧골 : 마을을 개척 할 당시 매화가 많았다하여 매골, 매곡(梅谷)이라 칭함.
  • 외칠1리(外七1里)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시 옷밭의 바깥쪽으로 되므로 바깥옷밭 또는 외칠전(外七田)이라 부르다 골짜기 바깥에 7개의 마을이 있다하여 외칠로 개편.
    • 방동 : 마을에 방화사(芳花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방화동(芳花洞)이라 부르다 마을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과 방화사의 절 이름을 따서 방동(芳洞)이라 부름.
    • 원두 : 원님이 관내 순시 때 유숙하던 원집이 있었다 하여 원두(院頭)라 칭함.
  • 외칠2리(外七2里)
    • 월천 : 마을 뒤에 달산이라는 산이 있어 산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달랫골, 월천(月川)이라 칭함.
    • 지리 : 후손들에게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례(智禮), 지리(智里)라 불리움.
  • 내칠1리(內七1里))
    골짜기 안에 일곱 동네가 있다하여 내칠(內七)리라 불리움.
    • 직현 : 일자산(一字山) 아래 마을이 일자형으로 취락 하였다 하여 곧음터, 직현(直峴)이라 칭함.
    • 교동 : 마을 가운데 세천이 흐르고 있어 집집마다 세천을 건너 다니는 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하여 다릿골, 교동(橋洞)이라 칭함.
    • 개현 : 개척 당시 주민들이 한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지 않고 흩어져 살았다고 하여 개터, 개현(個峴)이라 하다 근래에 와서 개현(介峴)이라 함.
    • 의동 : 마을 지형이 개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개미골, 의동(蟻洞)이라 칭함.
  • 내칠2리(內七2里)
    • 안옷밭 : 옷밭의 안쪽에 있다하여 안옷밭이라 불리움.
    • 산저 : 개척 당시 딱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산저(山楮)라고 하며 위, 아랫마을 구분을 위하여 상산저, 하산저로 구분함.
    • 월항 : 마을 지형이 반달모양으로 생겼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달 보러가는 첫째 동네'라는 뜻에서 다라미기, 월항(月項)이라 칭함.
  • 우라1리(牛羅1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 지형이 우형(牛形)을 이루고 있다하여 우라로 칭함.
    • 수피 : 마을 개척 당시 피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수피(禾皮)라 칭함.
  • 우라2리(牛羅2里)
    • 중리 : 개척 당시 동쪽 산정에 산성(山頂)이 있어 성촌(城村)이라 하였고 산에서 우렁이 소리가 들린다하여 명라동(鳴羅洞)이라 칭하다 자연부락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로 칭함.
    • 상리 : 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라 부름.
    • 지경 : 수피와 중리의 경계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경(地境)이라 칭함.
    • 시루미기(생식촌) :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하여 시루미기마을이라 함.
  • 감산1리(甘山1里)
    타 리동에 비해 산이 높지 않고 아름답게 생겼다하여 감산이라 칭함.
    • 감존 : 개척 당시 밤나무와 감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도 감존(甘存)이라 함.
    • 어두 : 신라 때 전란으로 왕자가 피신하고 있던 곳으로 황자동이라 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지형이 물고기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어머리 또는 어두(漁頭)라 칭함.
    • 원동 : 조선 순종 때 원의 지방 순시때 기거하던 집이 있었다 하여 원동(院洞)이라 함.
    • 탑동 :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거리 탑동(塔洞)이라 함.
  • 감산2리(甘山2里)
    • 장사 :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긴 뱀처럼 생겼다 하여 장사(長蛇)라고 하던 것이 조선말기에 정선비가 벼슬에 오르자 장사(長仕)로 부름.
    • 방터 : 마을의 형태가 꽃같이 생겼다 하여 방터 또는 방기(芳基)라 칭함.
    • 소목 :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하여 손목(損木)이라 하였다 하고, 혹은 고을이 좁아서 소목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 회골 : 마을에 큰 회나무가 있었다 하여 횟골이라 불렀다 하며 혹은 마을에 큰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해 새로 마을을 일으키고 난 다음 횟골, 회곡(恢谷)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