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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신라시대 : 신라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함
  • 고려시대 : 신라6부의 명칭 개명으로 가덕부(加德部)에 속함
  • 조선시대 : 경주부(慶州府) 동해면(東海面) - 감포, 양남 포함
  • 1895년 : 지방제 개편으로 경주부를 경주군(慶州郡)으로 개칭
  • 1906년 : 장기군(長鬐郡)에 편입, 내남면(內南面)으로 개칭
  • 1914년 : 장기군에 편입된 내남면, 양남면을 경주군으로 환속, 내남면을 외동면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양북면으로 개칭, 경주군 양북면이 됨
  • 1937년 : 감포지역이 읍으로 승격 분리, 15개 마을로 현재까지 구성
  • 1955년 : 경주읍이 시로 승격되고 군명칭을 월성군으로 개칭, 월성군 양북면
  • 1975년 : 범곡리 일부(석굴암)가 경주시에 편입
  • 1987년 : 봉길리 일부(월성원자력)가 양남면에 편입
  • 1989년 : 월성군을 경주군으로 명칭 환원, 경주군 양북면
  • 1995년 : 시군 통합으로 경주시 양북면으로 개칭
  • 2008년 : 15개 법정리 20개 행정동
  • 2021년 : 2021년 행정구역 명칭변경으로 문무대왕면으로 개칭

유래

  • 어일리(魚日里)

    1,600년 경 정응서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산의 지형이 고기 한마리를 닮았다하여 어일(魚一)이라 칭하여 오다가 1,900년 초기 이후부터 어일(魚日)로 개칭. 속칭 장터라고도 하며 문무대왕면 소재지로서 5일마다 시장이 개설되며 상거래가 활발하여 동해 3개 읍면(감포읍, 문무대왕면, 양남면)의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 와읍리(臥邑里)

    사발바위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바위가 길게 누워 있었으므로 와룡(臥龍)이라 하였다 하며 또는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왓골, 왯골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중기리 등을 병합하여 와읍리로 하였다.

  • 용동리(龍洞里)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龍頭) 또는 용동(龍洞)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 개편에 의하여 용동리로 하였다.

  • 권이리(權伊里)

    권이(權伊)는 약 250년 전 난을 피해온 권씨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권이라 불렀다고 한다.

  • 호암리(虎岩里)

    마을 앞산에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으므로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또는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 안동리(安洞里)

    조선중엽에 강찬성(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 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 장항리(獐項里)

    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장항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거 경주군 외동면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항리로 하였다.

  • 범곡리(凡谷里)

    옛날 석굴암 근처 사는 범이 자주 이 마을에 나타나므로 처음에는 호곡(虎谷)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범곡(凡谷), 범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입천리(卄川里)

    형제봉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스무 길이나 되며 내(川) 양편 하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스므내, 이십천 또는 입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스무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내를 이루므로 스무내로 하는데 이 스무내의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그대로 스무내(卄川)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송전리(松田里)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솔밭 또는 송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 죽전리(竹田里)

    영월 엄씨(嚴氏)가 개척한 마을로 큰 대나무밭 밑에 마을이 있어 대숲, 대숲말, 대밭 또는 죽전(竹田)이라 불렀다. 또 마을 밑에 대수못이 있으므로 죽연(竹淵)이라 부른다고 한다.

  • 두산리(斗山里)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으므로 돌산(乭山), 돌산리, 두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 용당리(龍堂里)

    신문왕의 부왕인 문무왕의 성룡호국(成龍護國)의 유언에 의해 수중릉을 만들고 유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하여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지하 수로를 만드니 수십 길의 용소가 생겨나서 용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당, 용당리, 돌담이라고도 하는데 돌담은 용이 못(潭)을 돌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용당리(龍潭里)와 원당리(院堂里)를 병합하여 용당리(龍堂里)로 하였다.

  • 구길리(九吉里)

    구길(九吉)은 마을 앞에 대종천(大鐘川)이 흐르는데, 마을의 형태가 마치 거북이 꼬리 같다고 하여 구미(龜尾)라 불렀다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역의 산이 거북이 엎드린 모양 같으므로 수북(水北) , 수남(水南), 전비(前飛), 하리(下里), 덕음(德音) 등의 부락을 합쳐 구길(龜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쓰기 어려운 거북구(龜)자를 아홉구(九)자로 바꾸어 구길리(九吉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봉길리(奉吉里)

    경주최씨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봉길(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봉길(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