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북면

천북면

  • 동산리
    • 동산은 최현익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음
    • 당시 마을 가운데로 개울물이 흘러 늪을 이루고 있었음.
    • 약 280년전 유한지란이가 늪 아래쪽에 다시 마을을 개척하여 "늪마을"이라 부르다가 1914년경부터 동산이라 부르게 되었음.
    • 『새터』는 조선중기에 대홍수로 말미암아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조선 현종때 김씨성을 가진이가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새터 또는『신기』, 『새각단』이라고 하였다함.
  • 덕산리
    • 덕산은 약 1,000년전 황씨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불방』 또는 『화방』이라 불러왔음.
    • 마을의 화재가 잦아 화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덕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덕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마을뒤의 산이 마치 『노적』처럼 산세가 평탄하므로 마치 한국인의 덕스러운 모습을 느끼게 한다고하여 『덕산』이라 불렀다고함.
  • 신당리
    • 신당은 신라무열왕때 원효대사가 이곳에 신당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신당』이라고 하였음
    • 『대밑』은 조선 태조때 허성구라는 선비가 대나무가 울창한 산 아래에 마을을 일구고 『대밑』『대하』라고 하였음.
  • 모아리
    • 『모아』는 옛날 이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몸에는 털이 유별나게 많고 체구가 컸으며 금방 걸어다녔고, 말을 할줄 알았는데 어느,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므로 뒤에 이름을 『모아』또는 『모의』라고 부르기도 함.
    • 『사잇골』은 모아와 배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사잇골", "새골" 또는 "간곡"이라 부름
    • 『배락골』은 옛날 이마을 한 가운데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있었는데 매년 많은 열매가 달리나 결실기가 가까워 지면 항상 익지못하고 낙과가 되므로 "배락골" 또는 "이락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노린골』은 비만 오면 모래가 흘러내려 황토물과 토사가 이 마을의 들을 덮었는데 노리미기 아래에 있었다고 하여 "노린골" 또는 "황곡", "황동"이라 불렀음
    • 『새터』는 일제시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 도로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 또는 "신기"라고 부르게 되었음.
  • 오야리
    • 『오야』는 마을앞의 넓은 평야가 매우 기름지고 비옥하여 "옥야"라 부르던 발음이 변하여 "오야"로 바뀌어 불리게 됨.
    • 『외실』은 오야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때 기와를 굽던 기와굴이 있었으므로 "와실"이라 불러오다가 발음이 변하여 "외실"로 불러지게 됨.
    • 『서평』은 옥야들 서쪽에 있다하여 "서평"이라 불렀음.
    • 『한백이』는 옛날에 한발이 극심했던 곳이라 하여 "함백이", "한박"이라고 부름.
  • 물천리
    • 『물천』은 "무내" "물천" 혹은 "퇴산"으로 불렀으며 옥동, 용락, 무내, 목실 4개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물천리로 하였음.
    • 『용락』은 신라경순왕 때 이 마을 깊숙한 곳에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뱀이 용으로 변하여 등천하면서 꼬리를 치니 못이 터지고 계곡이 생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용내기" "용락" "용락곡"이라 함.
    • 『목실』은 옛날 대낮에도 사나운 짐승이 출몰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울창한 수림을 없애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여 "목실" 또는 "목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옥동』은 신라때 이 마을의 앞산에 옥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그 계곡에서 옥이 많이 출토되어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부르게 되었음.
  • 갈곡리
    • 『갈곡』은 신라무열왕때 칡넝쿨이 우거진 산간의 땅을 개척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하여 "치실"또는 "갈골" "갈곡"이라 불렀음.
    • 『삼막골』은 옛날 이마을에 막집 3개가 있었다고 하여 "삼막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큰 골짜기 3개를 밭으로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서 "삼밭골" "삼박골"이라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삼막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남아골』은 신라때 이 마을에 부처가 있는 방향이 남쪽이라하여 "남아골"로 불렀음
    • 『양지마을』은 마을이 햇볕이 잘드는 남향 양지편에 있다하여 "양지마을" "양지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 성지리
    • 성지』는 신라시대에 "광곡"이라 부르다가 조선초기 소리지라는 작은 못이 생긴후 이 못 둑에 올라서면 봉덕사 종소리가 잘 들린다고 하여 조선 정조때의 선비 손여원이 못 이름을 성지로 바꾸게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소리못" "성지" "소리지"라 부르게 되었다함 또 황곡택이 있었으므로 "광곡역"이라 불렀는가 하면 손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소리지리, 소오리라고도 한다.
    • 『중방』은 제방을 따라 형성된 세 개의 자연부락중의 하나로 성지와 강정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방"이라 부르게 됨.
    • 『강정』은 물맑은 냇가에 경주최씨 문중의 정각이 있었으므로 "강정"이라 부름.
  • 화산리
    • 『화산』은 마을동쪽에 있는 연화봉에 올라가 보면 분지를 중심으로 둘러져있는 산들이 마치 꽃잎처럼 보인다고하여 "화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주위의 산에 계절마다 많은 꽃들이 피어 "화산" "꽃뫼" "곶메" "곶마"라고 부르기도 함
    • 『용사골』은 이 마을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깊은 웅덩이가 많은데 생긴 모양에 따라 "칼용치" "호박4용지" "길용치" "함용치"로 부르고 있으며 제일 큰 웅덩이인 길용치에 살던 숫뱀과 그 아래 호박용치에 살던 암뱀이 서로 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추곡" "용사골" "용사곡" "용소곡"이라고 불렀다고 함.
    • 『흥림』은 이 마을의 산에 검은 바위가 많다고 하여 "먹방골"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숲이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조선철종때부터 흑림이라 불렀으나 이 마을이 쇠잔해 갔으므로 다시 마을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일제시대부터 "흥림"으로 불러오고 있음.
    • 『새터』는 약 80년전부터 화산 남쪽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터" 또는 "신기"라 부르게 됨.
    • 『나리』는 신라시대 라씨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에 난을 피해왔다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난이 평정된 후에 그 선비가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뒤에 사람들이 그 선비의 성을 따서 "나리"라 부르게 외었다고 하며 혹은 "나리밭골"이라고도 부름.
    • 『진대땅』은 마을을 싸고 있는 산의 모양이 길고 야트막하게 뱀처럼 누워 있으므로 "땅 긴 대망이 땅" "긴대땅" "진대땅"이라고 불러오고 있음.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 출처표시
경주시청이 창작한 천북면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자료제공
  • 담당부서 : 시정새마을과 총무팀 (☎ 054-779-6581 ) /
  • 최근수정일 : 2021-03-11
만족도평가

현재 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조사결과는 서비스 개선을 위해 활용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