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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인교동
    • 1955.9.1.  경주시 인왕리, 교리
    • 1973.7.1.  인왕·교동이 인교동으로 통합
  • 도동동
    • 1910.10.8. 경주군 내동면 동방리
    • 1973.7.1.   동방·도지동이 도동동으로 통합
    • 1986.5.1.   도지·동방·남산·평동이 도동동으로 통합
  • 보황동
    • 1910.10.8. 경주군 내동면에서 구황리
    • 1955.9.1.   경주시 구황리. 경주군 내동면에서 보문동이 편입
    • 1973.7.1.   구황·보문동이 보황동으로 통합
    • 1986.5.1.   배반·구황·보문동이 보황동으로 통합
  • 월성동
    • 1998.11.14. 행정동 통합으로 인교(인왕·교동), 도동(동방·도지·남산), 보황(배반·구황·보문)동이 월성동으로 통합. 평동은 불국동으로 편입.

유래

  • 지역여건 및 특성

    문무로와 동해남부선이 관통하고 울산·포항 간 산업도로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보문관광단지의 관문이며, 첨성대, 분황사 모전석탑, 구황삼층석탑 등 99점의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음. 도시근교에 위치한 전형적인 미작농업 중심의 시내 근접한 농촌동으로서 소박한 인심과 충효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임.

  • 월성동의 지리적여건

    국도 7호선 문무로와 동해남부선인 철도가 동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으며, 울산·포항 간과 고속도로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보문관광단지의 관문이며, 토함산에서 발원한 사등이천과 남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합류하여 동방·배반·인왕·교촌의 문천으로 하여 형산강 지류와 합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남산, 동남쪽으로 명활산, 동대산 지역 내 가장자리에 낭산이 있어 산수가 수려할 뿐 아니라, 하천을 중심으로 내리들, 평들, 새보들, 보문들, 사리들 등 평야가 많아 쌀생산지로 주민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인심이 후하고 순박하나 자존심이 강한 편임.

    불국토인 남산과 호국사찰인 황용사지, 동양최고의 첨성대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어 민족문화의 산실임.

  • 인왕동(仁旺洞)
    • 마을의 자연환경
      • 신라5대 파사왕(波娑王) 22년(101)에 축조한 왕성인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북·동·남쪽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낭산(浪山)·도당산(都堂山)과 남산(南山), 선도산(仙桃山)이 원근에서 감싸주고, 토함산(吐含山)에서 시작하는 사등이천(史等伊川)이 동리 가운데 남천 (南川-蚊川)을 이루어 흐른다.
    • 마을의 역사
      • 인왕동은 이른 신라시대 부터 월성에 궁궐이 자리 잡았다. 신라 29대 태종(太宗)무열왕(武烈王)의 둘째왕자 김인문(金仁問)의 원찰(源刹)인 인용사(仁容寺)와 남산에 있는 왕정곡(王井谷)의 첫 글자를 따 인왕리(仁旺里)라 하였다.(旺자를 쓴 것은 王자를 피한 것이라 한다.)
        • 인왕리 : 남천과 인용사 주변 마을.
        • 새터 : 새터각단, 반월성 남쪽 200m거리에 있는 새마을인데 옛날에 있던 무성한 숲을 깍아내고 새터를 만들어 이룩하였다.
        • 월성마을 : 반월성 주위에 있는 마을.
        • 비두거리, 비둣거리 : 월성 동북에 있는 첨성대 주변의 마을인데, 첨성대를 비두라고 부른데서 생긴 마을이름이다.
        • 양지(陽地)마을 : 반월성 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이다.
  • 교동(校洞)
    • 마을의 자연환경
      • 시 중심가의 남부에 위치한다. 마을의 동쪽은 계림과 월성, 서쪽은 흥륜평야, 남쪽은 남천과 남산, 북쪽은 대능원과 각각 마주하고 있다. 계림과 고분군, 향교와 울창한 숲, 이끼낀 고가들이 즐비하여 역사의 향이 가득한 마을이다. 또 교동에는 자연부락인 천원마을이 오능의 동쪽에 있는데 대한에도 불갈(大旱不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하는 샘이 있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 마을의 역사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하여 향촌이라 일컬어 오다가 면제실시에 의하여 교리라 칭하였다.

      • 교리(校里) : 신라의 국학이 있었던 자리이며, 고려시대 이후부터 그곳이 향교가 되자 마을이름을 '교촌(校村)'이라 부르다가, 그 뒤 '교동(校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천원(泉源) : 문천 남쪽의 마을로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천원'이라 불렀다 한다.
  • 동방동(東方洞)
    • 마을의 자연환경
      •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4차선 국도 양편으로 형성된 마을로서 동해 남부선 기차역도 있다. 동으로는 동대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병풍처럼 가려서 천군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으로는 배반동, 서로는 넓은 평야를 두고 사등이천을 경계로 남산동과 접해 있다. 남동으로 도지, 남서는 평동과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평지마을이다.
    • 마을의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원래 진한 6촌시대 토함산(吐含山) 및 동대산맥 서남쪽에 위치한 이곳은 취산진지촌의 경역으로서 동방·도지·남산·평동 등 전역이 지백호의 정씨 시조가 자리하던 지역이라 한다. 인근인 도지동에 지석묘(고인돌)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동방(東方) : 시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방이라 칭하기도 하고, 경주시내에 원이 있어서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10리밖에 뜻있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고을이름을 도음동, 도음방동 등으로 부르다가 동방으로 하는 2가지 유래가 있다.
      • 망덕(望德) : 신라 31대 신문왕릉 서쪽에 위치한 망덕사지가 정면으로 보인다 하여 망덕이라 이름하였다 함.
      • 탑골(塔谷) : 신라시대 절과 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골이라 칭하였다 함.
      • 장골(長谷) : 자은곡(自隱谷)이라고도 하여 다른 부락에 비하여 골짜기가 길어서 조선시대 한 선비가 이곳에 와서 은거하였다고 전하며, 사람들이 은거하기에 적당하다고 하여 자은곡이라고도 한다. 조선말기부터 긴 고을이라 하여 장곡(長谷)으로 바뀌었다.
      • 뒷골 : '뒷고을'이라는 뜻으로, 후곡(後谷)이라고도 함.
      • 시장마을 : 면소마을이라고도 하여 5일마다 선 장터가 있었고, 면제실시 이후 내동면사무소가 위치했다고 하여 면소마을이라고도 하며, 농협창고, 동방역, 동방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음.
  • 도지동(道只洞)
    • 마을의 자연환경
      • 동쪽으로 동대봉산맥이 길게 남북간으로 누워있는 서편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경주-울산 간 국도와 나란히 동해남부선 철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으며, 서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마을 남쪽에 용내천이 조양과 경계를 이루고 사등이천과 합류하여 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
    • 마을의 역사

      지석묘(고인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先事時代)부터 사람이 거주한 듯하다. 사로6촌 중 취산진지촌의 일부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 도지(道只) : 신라시대부터 동방곡이라 불러오다가 조선시대에는 계남리라 이름하여 왔다고 하며, 일제시대에 도지라는 지명을 지었다고 함. 도지라는 지명은 신라시대 도덕사가 있었다고 하여 도(道)자와 지금부터 마을이 이루어진다 하여 지(只)자를 합쳐 도지라 하였다고 함.
      • 능곡(陵谷) : 능원(陵院), 능동(陵洞)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음, 신라49대 헌강왕(憲康王)의 능(陵)을 이곳에 쓸려고 하였으나 서남쪽에 있는 남산(금오산)이 울고 풍수해로 인하여 골이 생긴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을 쓰지 않고 남산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후부터 능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함.
  • 남산동(南山洞)
    • 마을의 자연환경
      • 신라의 불국정토(佛國淨土)로 숭앙받는 남산의 동쪽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토함산(吐含山)과 마석산(磨石山)을 시원으로 해서 형산강(兄山江)으로 흐르는 남천(南川)을 경계로 동방동과 북쪽은 인왕·배반동과 남쪽은 평동, 서쪽은 남산을 경계로 탑동·배동·내남면과 인접하고 있음.
    • 마을의 역사

      이 마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9년에 사량부(沙梁部)라 칭하다가 고려 태조23년 남산부(南山部)로 개칭한 것이 마을 이름의 시원이라고도 한다.

      • 안마을 : 안말, 안마, 내촌(內村), 피리사, 피촌등 전하는 이름이 많다. 신라시대 피리사(避里寺)라는 절이 있었던 연유로 피리촌(避里村), 피이촌(避伊村) 등으로 불려 왔으며, 동남산의 안쪽이 된다고 하여 안마을(內村)이라고 칭한다.
      • 탑마을(塔里) : 탑말, 탑마, 탑촌(塔村) 등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 남산사(南山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동서 각 양식이 다른 삼층석탑이 서 있다. 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탑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 구황동(九黃洞)
    •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으로 명활산(明活山), 남쪽에 낭산(狼山), 북쪽으로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이루어지는 경주평야의 동남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최대의 사찰이며 호국불교의 도장인 황용사지(皇龍寺趾, 사적6호)와 분황사(芬皇寺), 황복사지(皇福寺趾) 등 주요 문화재가 밀집되어 있다.

    • 마을의 역사

      신라 24대 진흥왕14년에 궁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시작할 때 아홉마리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고 이곳에 사원을 세울 것을 암시하였으므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구황동(九黃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 구황마을 : 1976년 황용사(黃龍寺) 발굴조사로 철거되었다.
      • 사리마을(沙理) : 활리(活理)로 불리기도 하며, 모래가 많아 생긴 이름이다.
      • 양지마을 : 구기(舊基), 구대(舊垈)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조선시대 역(驛)이 있었다가 새터로 옮겨 붙여진 마을이름이며, 최햇빛씨의 한글이름 쓰기로 양지마을로 개칭하였다.
      • 새터마을 : 신기(新基), 새각단이라고도 하며, 새터각단은 구기에서 역(驛)이 옮겨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 보문동(普門洞)
    • 마을의 자연환경

      명활산(明活山)이 병풍처럼 감싸고 경주분지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으로 드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낭산(狼山)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선도산(仙挑山)이 보이고 북쪽에는 소금강산(小金剛山)과 알천(閼川-北川)이, 남쪽에는 남산(南山)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 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사적180호), 보문사지(普門寺地), 명활산성(明活山城-사적47호)등이 있다.

    • 마을의 역사

      마을 앞들에 보문사(普門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까닭에 보문동(普門洞)이라고 하며, 지사(地師)가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부르며 학자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신라시대의 금산가라촌(金山加利村), 한지부(漢只部)등으로 추정되며, 8-9세기의 석실고분이 명활산(明活山)에 분포하고 있으며, 마을 동쪽에는 18대 실성왕(實聖王)때 축조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있다.

      • 남촌(南村) :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낸 우암(寓菴) 남구명(南九明)의 손(孫)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남용만(南龍萬)이 이곳에 와서 마을을 이루어 대대로 살고 있다 하여 '남촌', 남씨마을'이라 한다.
      • 이촌(李村) : 조선경종(朝鮮景宗)때 정헌공(定軒公) 이종상(李鍾祥)의 증조부 성균관 생원 이돈항(李敦恒)이 이곳으로 와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이존', '이씨마을'이라고 불렀다.
      • 봉동(峰洞)(봉우각단·봉화각단·봉각단) : 이 마을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봉(鳳)이 울었다 하여 봉(鳳)마을이라고도 한다. 또한 1876년 김석우(金錫禹)라는 선비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 수머리(數머리) : 오리수(五里數)라는 숲이 시작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 강선(降仙)마을 : 약100년 전 최호해(崔昊海)라는 사람이 처음 입주하여 살았는데, 신라 실성왕(實性王) 때 신선이 내려온 곳이라 한다.
  • 배반동(排盤洞)
    • 마을의 자연환경
      • 동쪽은 경주의 진산(錢山)이었던 낭산(狼山)의 서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영산(靈山)이자 불국정토(佛國淨土)였던 남산의 동쪽가지이며, 이곳에는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사적182), 신문왕릉(神文王陵-사적182호), 효공왕릉(孝恭王陵-사적183호), 사천왕사지(四天王寺地-사적8호), 망덕사지(望德寺地-사적7호) 등 많은 사적이 자리하고 있다.
    • 마을의 역사

      경주부의 동쪽 끝마을로서 배반(排盤)이라 하였음.

      • 배부남(排府南)·배반(排盤) : 조선시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배부남(排府南)으로 불렀다가 줄여 배반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장지버든·장제버든·장자동(長子洞)·장제동(長堤洞)·장사(長沙)·벌지지(伐知旨) :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고구려에 가서 왕자 보해(寶海)를 구출해오고 바로 일본으로가 왕자 미해(美海)를 구하기 위해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떠났다. 그 부인이 이 사실을 듣고 따라갔으나 박제상은 이미 바다에 떠있는 배위에서 손만 흔들 뿐이었다. 부인은 되돌아오다가 망덕사문 남쪽 모래밭에서 다리를 뻗고 슬피 울며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장사(長沙)·벌지지(伐知旨) 또는 장지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까지 마을이름으로 전해 사용된다. 또 이 동네 위에 우물이 있어 이 우물물을 먹고 자란 사람이 장군이 되었다하여 장제마을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