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로와 동해남부선이 관통하고 울산·포항 간 산업도로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보문관광단지의 관문이며, 첨성대, 분황사 모전석탑, 구황삼층석탑 등 99점의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음. 도시근교에 위치한 전형적인 미작농업 중심의 시내 근접한 농촌동으로서 소박한 인심과 충효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임.
국도 7호선 문무로와 동해남부선인 철도가 동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으며, 울산·포항 간과 고속도로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보문관광단지의 관문이며, 토함산에서 발원한 사등이천과 남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합류하여 동방·배반·인왕·교촌의 문천으로 하여 형산강 지류와 합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남산, 동남쪽으로 명활산, 동대산 지역 내 가장자리에 낭산이 있어 산수가 수려할 뿐 아니라, 하천을 중심으로 내리들, 평들, 새보들, 보문들, 사리들 등 평야가 많아 쌀생산지로 주민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인심이 후하고 순박하나 자존심이 강한 편임.
불국토인 남산과 호국사찰인 황용사지, 동양최고의 첨성대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어 민족문화의 산실임.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하여 향촌이라 일컬어 오다가 면제실시에 의하여 교리라 칭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원래 진한 6촌시대 토함산(吐含山) 및 동대산맥 서남쪽에 위치한 이곳은 취산진지촌의 경역으로서 동방·도지·남산·평동 등 전역이 지백호의 정씨 시조가 자리하던 지역이라 한다. 인근인 도지동에 지석묘(고인돌)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석묘(고인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先事時代)부터 사람이 거주한 듯하다. 사로6촌 중 취산진지촌의 일부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마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9년에 사량부(沙梁部)라 칭하다가 고려 태조23년 남산부(南山部)로 개칭한 것이 마을 이름의 시원이라고도 한다.
동쪽으로 명활산(明活山), 남쪽에 낭산(狼山), 북쪽으로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이루어지는 경주평야의 동남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최대의 사찰이며 호국불교의 도장인 황용사지(皇龍寺趾, 사적6호)와 분황사(芬皇寺), 황복사지(皇福寺趾) 등 주요 문화재가 밀집되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14년에 궁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시작할 때 아홉마리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고 이곳에 사원을 세울 것을 암시하였으므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구황동(九黃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활산(明活山)이 병풍처럼 감싸고 경주분지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으로 드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낭산(狼山)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선도산(仙挑山)이 보이고 북쪽에는 소금강산(小金剛山)과 알천(閼川-北川)이, 남쪽에는 남산(南山)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 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사적180호), 보문사지(普門寺地), 명활산성(明活山城-사적47호)등이 있다.
마을 앞들에 보문사(普門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까닭에 보문동(普門洞)이라고 하며, 지사(地師)가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부르며 학자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신라시대의 금산가라촌(金山加利村), 한지부(漢只部)등으로 추정되며, 8-9세기의 석실고분이 명활산(明活山)에 분포하고 있으며, 마을 동쪽에는 18대 실성왕(實聖王)때 축조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있다.
경주부의 동쪽 끝마을로서 배반(排盤)이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