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동
- 황남동
- 대나무가 많은 데다 죽현릉(미추왕능)이 있어 竹理라고함
- 임금이 살던 마을이라하여 皇村 이라함
- 신라고분을 皇氏무덤이라고 불렀으며 이 고분을 중심으로 하여 南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皇南이라함.
- 1955. 9. 1. 皇南理에서 法定理洞인 皇南洞 으로됨.
- 탑정동
- 행정동인 탑정동 내에는 4개 법정동(사정동, 탑동, 배동, 율동)이 있으며 내남면, 월성, 황남, 중부, 선도동을 경계로 하여 경주시의 관문인 톨게이트가 위치하고 남북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동해남부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임.
- 시내에 인접한 구릉 평야지대에 비옥한 토질과 알맞은 기후여건으로 미작을 중심으로 찰토마토등 시설채소 집단재배지역으로 유명함.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산과 신라건국의 설화를 간직한 나정과 양산재, 오릉, 창림사지등 60여점의 주요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지역임.
- 사정동
- 면적(㎡) : 943,802
- 연혁
- 조선말기 : 사정, 앞사정, 뒷사정, 국당을 통틀어 사정(沙正동)으로 부름
- 1914. 04. 01 :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사정이라 부름
- 1955. 09. 01 : 市制 실시에 의해 法定洞인 사정동으로 부름
- 1973. 07. 01 : 법정동인 사정동과 탑동을 묶어 行政洞인 塔正洞으로 운영
- 1975. 10. 01 : 법정동인 사정동, 탑동, 율동(1, 2, 4리), 배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1986. 05. 01 : 법정동인 사정동, 탑동, 율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마을 소개
- 사정(沙正)은 맑은 물이 흐르는 문천(汶川,蚊川)가에 있는 마을로 부드럽고 고운 모래가 많다하여 ‘沙正’이라 일컬었다. 『구역거리』는 일제때 이곳에 경주역이 있었으므로 그 후 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구역(舊驛)이라 불렀다.
- 『국당』은 사정 남쪽, 남천가에 있는 마을로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당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국화를 재배하는 집이 있어 ‘국당’으로 불리웠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물구덩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구딩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국당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라호 태풍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말이다.
- 참고
- 당수나무 : 흥륜사 서쪽에 있는 노목인 포구나무와 회나무 사이에서 목이 없는 부처가 나왔다 하며, 옛날에는 이 나무 앞에서 당제를 지냈다 한다.
- 돈대밭 : 흥륜사터의 법당자리에 감나무밭을 일구어 돈대밭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흥륜사 경내에 있다.
- 탑동
- 면적(㎡) : 3,254,199
- 연혁
- 1914. 04. 01 :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탑마을, 휘멀리, 식혜골, 남간을 통틀어 경주군 내남면 탑리라 부름
- 1955. 09. 01 : 市制 실시에 의하여 법정동인 탑동으로 부름
- 1973. 07. 01 : 법정동인 탑동과 사정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1975. 10. 01 : 법정동인 탑동, 사정동, 율동(1, 2, 4리), 배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1986. 05. 01 : 법정동인 탑동, 사정동, 율동, 배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마을 소개
- 『탑리(塔里)』는 ‘탑말’, 탑동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담암사(曇巖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는데, 절은 없어지고 절터에 탑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탑리라 불렀다 한다
- 『남간(南磵)』은 신라시대에 지은 南磵寺가 있던 마을이라 절이름을 따서 ‘남간’ 혹은 ‘남관’이라 불렀고, 月城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月南’이라고도 했다『식혜곡(識慧谷)』은 옛날 識慧寺란 절이 있었으므로 ‘식혜골’ 또는 식화곡(識花谷)이라 불리고 있다.
- 『휘멀리』는 오릉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휘멀어졌다(휘돌아 앉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참고
- 강단 : 남간의 남쪽에 있는 들
- 강단못 : 강단에 물을 대는 못
- 배동
- 면적(㎡) : 6,489,606
- 연혁
- 1914. 04. 01 :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배리와 포석리를 합하여 경주군 내남면 배리라 부름
- 1979. 10. 01 : 법정동인 배동, 사정동, 탑동, 율동(1,2,4리)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1986. 05. 01 : 법정동인 배동, 사정동, 탑동, 율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마을 소개
- 『배리(拜里)』는 삼릉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외와(外臥)에 있는 큰 벼슬아치 집에 祭를 올리는데 그 집의 풍속에 따라 스님이 술잔을 먼저 올려야 하므로 이 사람 저 사람 마땅한 사람을 고르다가 그만 시간을 넘겨버릴 지경이 되었다. 마침 길을 가는 한 중을 하인들이 사정을 해 모시고 왔으므로 주인이 만나보니 의복이 남루하고 행색이 말이 아닌지라 불쾌하게 여겨 도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순식간에 중은 온데 간데 없이 주인의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예사 중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주인이 크게 깨닫고 사람을 풀어 뒤쫓아 보니 지금의 배리마을 뒤편(큰절골)에 있는 절로 들어갔다. 뒤따라 온 주인과 아랫사람들이 문밖에 엎드려 절을 하며 사죄하였다 하여 그후 사람들이 ‘배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 『포석(鮑石)』은 조선말기에 교리(校里) 최부자의 후손이 이곳에 옮겨와 마을을 이루었다는데 마을이 포석정 옆에 있으므로 ‘포석마을’이라 일컬었다고 전한다
- 참고
- 가는골 : 부엉드미 남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 각골 : 부챗등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갯들 : 마당배미 서쪽 냇가에 있는 들
- 율동
- 면적(㎡) : 8,985,802
- 연혁
- 1914. 04. 01 : 행정구역 폐합으로 밤못골, 못안, 도초, 매바우마을, 선두마을, 두대를 통틀어 경주군 내남면 율동리(1, 2, 3, 4리)라 부름
- 1979. 10. 01 : 행정동 개편에 의하여 법정동인 율동 1, 2, 4리는 행정동인 탑정동에 편입 운영되고 법정동인 율동3리(두대)는 행정 동인 서현동에 편입 운영됨
- 1986. 05. 01 : 법정동인 율동, 사정동, 탑동, 율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
- 마을 소개
- 『율동(栗洞)』은 신라때 염불사(念佛寺)라는 큰절이 있었는데 이곳의 地勢가 목마른 말의 형상이므로, 말이 물을 먹도록 상제(上堤)와 하제(下堤)의 두 못을 막아 염불지(念佛池)라 하였다는데 상제를 안못, 하제를 바깥못이라 불렀다.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栗里라고도 한다
- 『방목골』은 바깥 못가에 있었으므로 ‘밖못골’이라 부르다가 ‘방못골’이 되었으며 경주손씨의 집성촌이다
- 『도초(道草)』는 마을이 산을 안고 있다고 하여 ‘뒷침이 마을’로 불리우다가 조선초기부터 ‘뒷초’로 불렸으며 일제때 ‘도초’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 『두대(斗垈)』는 신라때 장씨 성을 가진 만석꾼이 백토산(白土山)에 올라가 마을을 굽어보니 지세가 쌀뒤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 『매바우마을』은 지금부터 약 350년 전에 서인석(徐仁石)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마을 남쪽에 높이 2.6m, 넓이 5㎡ 가량되는 큰 바위 위에 매가 살고 있었으므로 ‘매바우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 참고
- 당항(當項) : 당매기, 당미기, 당목이라고도 부르는 두대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당집이 있었는데 국도를 넓히면서 마을은 없어지고 당집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