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역사
설화이야기
한국관광의 메카 “Beautiful Gyeongju”가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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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성왕(元聖王), 호국용(護國龍)을 되살리다 (세미리(용)을 내놓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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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元聖王) 11년(795) 을해년(乙亥年)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다 귀국길에 올랐는데, 그 사절이 떠난 지 하루 뒤에 두 여자가 궁궐로 찾아왔다.
“그대들은 무슨일로 왔는가?”
“예, 저희들은 동천사(東泉寺) 동지(東池), 서지(西池)에 있는 두 호국용(護國龍)의 아내입니다. 이번에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지아비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세 마
리를 요술로 작은 고기로 둔갑시켜 통속에 넣어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데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우리 지아비와 분황사, 세 호국용을 되돌려 나라를 지킬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며 읍소하는 것이었다.
이에 원성왕이 크게 놀라 급히 신료를 거느리고 쫒아가서 하양관(河陽館, 지금 경산 하양읍)에서 칙사 사절에게 다시 연회를 베풀어 잡아두고서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세 호국용(護國龍)을 잡아 가는 것이냐? 만일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당장 목을 베리라!” 하며 벽력같은 대성으로 일갈하자, 겁에질린 하서국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말하길
“저희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옵소서” 하며 통에 든 고기 세 마리를 왕께 바쳤다.
이에 당나라 사절은 신라 원성왕의 명석함과 신통한 예지력, 그리고 추상같은 호통에 경탄, 감복하였다.
원성왕이 하서국 사람들로부터 다시 돌려받은 세 마리 고기, 즉 호국용을 동천사(東泉寺)의 우물 동지(東池)와 서지(西池) 그리고 분황사 우물 세 곳에 다시 놓아 주자 물속에서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용이 되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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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문왕(景文王)의 세가지 아름다움(三美)과, 세가지 이익(三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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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은 희강왕(僖康王)의 아들 계명(啓明) 아찬의 아들이고 이름은 응렴(膺簾)이다. 18살에 국선(國仙)화랑이 되어 자못 이름을 떨쳤다. 20살이 되자 헌안왕이 응렴을 궁중에 불러 위로의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때 왕이 랑의 손을 잡고 물었다.
“랑은 국선이 되어 사방 국토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으니 무슨 특이한 것을 본 것이 없는가? 있다면 내게 말하여 보라”
“예, 신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를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들어보세”
“예,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부터 귀하고 세력이 있으면서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오, 참으로 훌륭하구나”
왕은 응렴랑의 그 말을 듣고 감동하여 랑의 인간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지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덕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하여 왕이
“짐에게 두 딸이 있는데 랑의 배필을 삼아 시중을 들게 하리라” 했다.
“황송하옵니다”
랑이 잔치가 파하고 집에 돌아와 어버이에게 왕의 말씀을 고하니, 부모는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가족회의를 열고, 왕의 맏 공주는 용모가 매우 못나고 볼모양이 없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고 착하니 둘째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자고 결론을 내었다. 그 때 흥륭사 중인 범교스님(範敎師)이 이 소식을 듣고 응렴랑의 집에 와서 랑에게 물었다.
“왕께서 랑의 배필로 공주를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두 공주 중 어느 공주를 간택하겠습니까?”
“부모님과 가족들이 모두 아름답고 착한 둘째 공주를 택함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신가요? 그러나 그건 아니됩니다. 랑이 만일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랑의 면전에서 자결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맏 공주에게 장가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하여 결정하소서”
라고 정색하면서 첫째 공주를 택하라고 권유했는데 그 어조가 어찌나 간곡한지 응렴랑은 어쩔 수 없이
“스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맏 공주를 선택하기로 결심 하였다.
그 후 헌안왕이 택일하여 궁궐에서 사자를 보내어 ‘두 공주 중에 랑의 뜻대로 간택 결정하라’고 함에 응렴랑은 맏 공주를 받아들이겠다고 아뢰었다. 이렇게 혼사를 정해 놓고 난 뒤 3개월이 지나 갑자기 헌안왕의 병세가 위독해졌다. 그러자 왕은 신료 백관을 불러 놓고 유언했다.
“짐은 태자가 없도다. 공주뿐이니 짐의 천추만세(千秋萬歲)후엔 마땅히 맏 공주의 배필인 응렴이 왕위를 이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자 신하들이 이를 따랐다. 이분이 경문왕이다.
훗날 경문왕이 범교사에게 물었다.
“전일에 스님께서 짐이 맏 공주를 간택하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하였는데 그건 무엇이었소?”
“예, 말씀드리지요,
첫째는, 맏 공주를 간택하여 왕과 왕비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고, 이로 인하여 더욱 총애를 받은 것이요
둘째는, 맏 공주에 장가 들으셨기에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요.
셋째는 원하던 둘째 공주도 국왕은 차비(次妃)로 취할 수 있었으니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고 아뢰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왕은 범교사의 권유 덕택에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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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신(三山神) 유신랑(庾信郞)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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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랑(庾信郞)이 18살에 국선화랑(國仙花郞)이 되고 그의 화랑도를 룡화향도(龍華香徒)라 칭했다. 그의 낭도중에 백석(白石)이란 이가 있었는데, 유신랑이 장차 고구려,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모색하고 수련하는 것을 간파하고 백석이 유신을 꾀었다.
“유신랑께서 웅도(雄圖)를 이루려면 나와 함께 적국에 가서 그들의 정세를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그러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귀에 솔깃했다. 또한 백석은 항상 충직한 신임받는 낭도가 아니던가? 유신랑은 백석의 제의에 기뻐, 흔쾌히 응하며 적국 정탐의 길에 올랐다.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하면서 잠시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두 처녀가 그들을 따라왔다.
걸음을 재촉하여 골화(骨火, 지금의 영천)에 이르러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또 한 아가씨가 갑자기 나타나 유신랑에게 함께 어울려 즐기자 함에, 유신랑이 세 아가씨와 어울려 함께 기쁘고 즐겁게 놀았다. 아가씨들이 유신랑에게 맛있는 과자를 내놓고 권하니 유신랑은 맛있게 받아먹으며 서로 마음을 허락했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세 아가씨가 물어, 원정의 목적을 말해 주니, 이를 듣고 아가씨들은 랑의 장한 뜻을 잘 알겠다 하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더니 한 아가씨가 말하기를
“원컨대 랑은 종자 백석을 여기 있으라하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에 들어가 정담을 나눔이 어떨런지요?”
하며 은근히 권하자, 유신랑이 백석을 때어놓고 그들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숲으로 들어간 세 아가씨들이 갑자기 신(神)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 골화(骨火), 혈례(穴禮), 삼산(三山)의 호국 신이노라. 지금 랑이 적국의 첩자에 속아 사지로 유인되어 가는데 랑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노라” 하고 말을 마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크게 놀란 유신랑이 삼산신께 두 번 절하고 나와, 골화관(骨火館)에 유숙하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보니 적국을 정탐하기 위해 준비해 둔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내일 같이 돌아가 챙겨 오도록 하자” 하니 “예, 그러시지요” 하고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길로 서울(경주) 집으로 돌아온 유신랑은 즉시 휘하 낭도들에게 지시하여 백석을 포박하라 하고 곧바로 취조했다.
“이실직고하라. 네놈이 적국의 첩자임을 알고 있노라” 하니
처음 몇 번 아니라고 우기다 이내 백석이 이실직고 했다.
“나는 고구려 사람이오! 장차 내 조국을 멸망시킬 신라 대장을 내 나라로 유인하여 잡아 죽이려 했소!”
하고 실토했다. 하마터면 첩자의 꾀임에 넘어가 죽을뻔한 신라의 큰 동량(棟梁), 유신랑이 삼산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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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文姬) 꿈을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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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누이는 보희(宝姬)에, 아명은 아해(阿海)고,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에 아명은 아지(阿地)다. 어느 날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오줌이 서울(경주)에 가득 찼다. 아침에 일어나 아녀자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것도 좋지 않거늘 그 오줌이 경주에 가득차니 면구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얄궂은 일이었다. 언니 보희가 간밤 꿈을 동생 문희에게 이야기 했더니
“언니, 그 꿈이 깨름직 하거든 나에게 파세요.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그래? 좋아, 팔께 그러면 너는 무엇을 주고 사겠느냐?”
“언니, 비단 치마 저고리 한 벌을 주면 되겠지요?”
“좋아, 그러자꾸나”
“자! 간밤 꿈을 통째로 문희에게 주마!”
“자! 언니도 비단 치마저고리 한 벌을 받으세요”
그렇게 점잖고 어른스런 언니는 깜직하고 예쁘고 총명한 동생에게 꿈을 팔았다.
문희는 언니의 꿈이 예사 꿈이 아닌 비범한 꿈인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오줌이 서울(경주) 도성에 차는 것은 서울을 지배할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지 10여일이 지나서 오빠인 유신이 춘추공과 집 앞에서 공을 찼는데,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 띠를 떨어뜨리고 옷 띠를 달아 주겠노라 하였다.
집으로 들어온 유신랑은 언니 보희에게 옷 띠를 꿰매 드리라 하니
“어찌 처녀가 춘추공 같은 귀공자를 가볍게 만나 옷을 꿰멜수 있겠습니까?” 하며 부끄러워 하길래
동생 문희에게 부탁하니 문희는 선뜻 기쁘게 응하였다.
춘추공을 자기 방으로 맞아 들인 문희가 떨어진 띠를 꿰메는데, 춘추는 문희의 빛나는 미모와 우아한 자태에 눈이 부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둘은 유신의 소개로 자주 만나고 사랑을 싹 틔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예상치 못한 큰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문희가 임신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유신은 선덕공주가 남산에 행차하는 날, 마당 한켠에 나무를 쌓아, 그 가운데 문희를 묶어 놓고 불을 지르며, 혼인도 하지 않은 진골 명문가의 처녀가 임신을 하였으니 가법에 따라 화형에 처한다고 소문냈다. 그 때 남산에 행차 중이던 선덕공주가 서울 복판에서 연기와 불꽃이 치솟자, 놀라며 옆에 시종하던 춘추에게 물으니 좌우에서 신하들이 아뢰기를
“유신이 그 누이가 육례를 올리지 않았는데 임신하였다 하여 가법에 따라 불에 태워 죽인다고 합니다”
라고 아뢰자 옆의 춘추공 만이 안절부절 못하고 사색이 되었다. 공주는 춘추에게
“누가 그랬다고 하더냐?” 고 묻자 춘추는 더 이상 대답치 못하고 그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에 공주는 눈치를 채고
“네 소행이로구나. 어서 달려가서 내 명으로 화형을 중지 시키고 혼인을 윤허 한다 전하거라” 하니
그제야 춘추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중지하시오. 화형을 중지하시오! 공주마마의 명이오!” 하고 외쳤다.
불속에 죄인을 넣을 듯이 연극을 하며 기색을 살피던 유신은 마지못한 듯 중지했고, 그 후 춘추와 문희 둘은 육례를 갖추어 혼인하고, 뒷날에 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태종 무열왕이오. 문희는 문명왕후가 되었다.
결국 보희는 비단 치마저고리 한 벌과 왕후를 바꾸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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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 실례랑(失禮郞)을 구출한 백률사 관음보살(觀音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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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 남쪽 봉우리에 백률사(栢栗寺)란 절이 있는데, 이 절에는 신장(神將)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란 전설이 있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있어 영험하기로 유명했다.
때는 효조왕 원년(692), 효조왕이 사찬 대현의 아들 실례랑(失禮郞)을 국선(國仙)화랑으로 삼았다. 실례랑은 진골 왕족으로 화랑이 되어 영랑(永郞), 남랑(南郞), 안상랑(安詳郞)과 함께 사선(四仙)으로 유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는 1,000인이었으며 그 중 안상과는 매우 친하여 함께 잘 어울렸다.
효조왕 원년(692) 3월에 실례랑은 낭도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지구(지금의 강원도 홍천군)에 유람하러 갔다가 북명(지금의 원산만)에 이르렀을때 말갈의 습격을 받아 안상과 함께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왕과 신하들은 큰 충격을 받고 민심은 경악과 울분에 들끓었다.
설상가상으로 왕과 신료들이 안타까움에 탄식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어, 조사케 하니 이제는 천존고에 보관 중이던 거문고와 신적(神笛), 두 국보까지 감쪽같이 없어졌다.
온 나라가 비탄과 충격에 빠져 든 5월 보름에 실례랑의 부모가 백률사 관음보살상 앞에 나가 여러 날을 지성으로 아들을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부모는 지칠대로 지쳐 쓰러질 정도였고 눈에는 헛것이 보이는 지경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관음보살상 향탁 위에 거문고와 신적이 놓여 있고 실례랑과 안상랑 두사람이 관음보살상 뒤에 와서 있지 않는가? 부모는 너무나 놀라 눈을 비비고 정신을 가다듬고, 꿈인가 생시인가 꼬집어 봐도 생시임이 틀림없었다. 부모는 너무도 감격하여 울며 자식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이고 네가 살아 돌아 왔구나. 관음보살님 고맙습니다.”
하며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부모는 너무도 기뻐 둘에게 어찌된 것인지 사연을 물어보니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장군 집에서 마굿간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들판에서 말먹이를 주고 있는 중에 용모가 단정한 스님 한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와서 위로하기를
“고향이 그립지 않느냐?’ 함에 꿇어 앉아
“나라님과 어버이의 그리움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니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 하여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안상이 와 있어 반가워 하고 있는 중에 스님이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사람에게 주면서 타라하고 스님은 거문고를 타셨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곳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는 백률사 관음보살의 신령스러운 영험이었다. 그들을 구해 온 스님은 바로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감격하여 백률사 관음대비상에 황금 10량짜리 그릇 5벌과, 은그릇 10량짜리 5벌 등을 시주하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 조세를 면제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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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 대장 비형랑(鼻荊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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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이 특별한 비형랑(鼻荊郞)을 진평왕은 사랑하여 궁중에 데려다 잘 길러 15살이 되자 집사란 벼슬에 임명했다. 그러나 비형랑은 밤마다 월성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荒川)언덕에 가서 도깨비들과 어울려 노는것이었다. 그러자 진평왕이 군대 50명을 시켜 밤에 못 나가도록 비형랑을 지키게 했지만 그는 신통력으로 궁성 성벽을 넘어 도망쳐, 여전히 서천 넘어 도깨비들을 거느리고 놀다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가 울릴때쯤에야 궁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왕은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받고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도깨비를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 도깨비 무리를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서천 내에 다리를 놓아주면 어떻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비형랑은 즉시 도깨비 무리를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를 도께비들이 만든 다리라 하여 귀교(鬼橋), 즉 도깨비다리라 불렀다.
그 후 왕이 비형랑에게 또 물었다.
“너희들 도깨비 무리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만한 자가 있느냐?”
“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능히 정사를 도울만 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비형랑이 이튿날 길달(吉達)이란 자를 궁중에 데리고 오자 왕이 그를 만나보고 흡족하여 집사벼슬에 앉혔다. 그리고 왕은 길달이 유능할 뿐만 아니라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까지 하자, 마침 아들이 없었던 이벌찬 임종에게 길달을 아들로 삼게 해 주었다.
길달을 아들로 삼은 임종이 어느날 길달에게 말하였다.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하나 세워야겠는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예, 맡겨 주시옵소서.”
유능한 길달이 임종의 명을 받고 흥륜사 남쪽에 훌륭한 문루를 건립하자 임종은 길달로 하여금 밤마다 그 문루 위의 누각에 가서 자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로 그 문루를 길달문이라 불렀다.
그러나 도깨비로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다 조정 관리로 생활하는 것은 우리에 갇힌 부자유한 속박된 몸이라 죽기보다 싫었던 길달은 어느날 여우로 둔갑하여 도망쳤다. 이에 비형랑이 도깨비 무리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이니, 도깨비 무리들은 비형랑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
그 이후로 신라 사람들은 집안의 잡귀를 물리칠때 다음의 글을 문에 붙였다고 한다.
성제(聖帝)의 혼이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의 집이니라
날고 달리는 모든 도깨비 무리들아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