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세계는 K-POP의 계절 속으로
한류 신드롬에서
세계의 K-POP까지
글 글 _ 정병욱(대중음악 평론가)
온다는 기척 없이 봄이 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징후는 분명 있었을 텐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상기후가 빚어낸 특수 현상일 수도 있다.
최근 한국 콘텐츠의 전 세계적인 붐은 마치 봄을 넘어 어느덧 성큼 여름에 다가서고 있는 것만 같다.
한국의 아이돌, 세계의 표준이 되다.
일러스트
1996년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국내 매체와 대중문화계에 처음 본격적으로 쓰였을 때 한국의 아이돌이 세계무대를 호령하는 오늘을 조금이라도 예견한 이가 있었을까? 바로 다음 해에 앞서 대형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정착한 일본의 아이돌 업계를 벤치마킹한 한국의 1세대 아이돌이 두각을 드러내고, 저마다 ‘너는 어느 그룹의 팬이냐’를 두고 친구들이 옥신각신할 때 20년 만에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리라 예상한 이가 있을까? 이제는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일본 내부에서 한국의 아티스트 육성 시스템을 본받으려 고심한다. 방탄소년단과 몬스타엑스 등은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해외 차트를 휩쓸고 각종 시상식과 TV쇼에 등장했으며, 블랙핑크는 해외 대형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고 유튜브 기록을 여럿 갈아 치웠다. 1960년대 비틀스를 시작으로 영국의 대중음악이 미국 팝음악 시장을 장악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현상에 빗댄 ‘코리안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일찌감치 어딘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바 있다. 2000년대 아이돌 1, 2세대 그룹들이 처음으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렸을 때, 10여 년 전 싸이의 <강남스타일(2012)>이 한국 노래 및 한국어 노래 최초로 빌보드 순위권에 올랐을 때다. 당시 이들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에 이를 1990년대 말 일본에 불었던 한류에 빗대 ‘한류 2.0’, ‘한류 3.0’로 부르거나 ‘2차 한류’, ‘3차 한류’로 부르며 사람들은 흥분했다. K-POP, K-Fashion, K-Drama 등 다양한 장르 콘텐츠에 ‘K’ 브랜드를 입혀 ‘우리 이렇게 잘나간다’고 홍보하기 바빴다. 자연히 이를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에 반해 요즘 분위기는 정반대다. 한국인이 나서서 굳이 “두 유 노 박지성?”, “두 유 노 김연아?” 묻지 않아도 외국인이 먼저 “두 유 노 BTS?”를 묻는 시대다. K-POP 아이돌의 성공을 도리어 국내에서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마저 들릴 정도다. 마치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앞두고 아카데미 시상식을 미국 ‘로컬’ 시상식으로 태연하게 치부한 것처럼 오히려 대단한 성공 앞에 이전만큼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을 통해 이전과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뭐 어때? 아이돌 팝은 K-POP이 보편인 게 당연하잖아?’
전통의 재발견, 우리 것 아닌 모두의 것
지난해 방탄소년단의 <Dynamite> 신드롬 한편에서 또 다른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게 판소리를 바탕에 둔 ‘이날치’였다는 사실 또한 무척 고무적이다. 지금의 K-POP 콘텐츠가 그저 정교하게 만든 글로벌 스탠다드의 일환이 아니라 전통과 지역성을 소재로 무수히 발전해가는 새로운 ‘무엇’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우리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을 뒤섞은 이른 바 K-크로스오버(Crossover) 음악은 몇 년 전부터 국내보다 세계 무대에서 먼저 활약을 펼치고 있다. 국악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현대 록 사운드를 들려줘 세계 유수의 월드뮤직 및 록 페스티벌에 연이어 초대받은 잠비나이가 대표적이다. 밴드 씽씽은 2017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공영라디오 NPR 뮤직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 출연해 해체 전까지 K-Music의 파격적이고도 현대적인 감각을 앞장서 선보였다. 뒤를 이어 블랙스트링, 노선택과 소울소스 meets 김율희, 동양고주파, 추다혜 차지스 등 새로운 스타가 연이어 떠올랐다.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트렌드에 발맞춰 방탄소년단의 슈가는 ‘어거스트 디’라는 예명으로 전통 음악 <대취타(2020)>를 동명의 곡에 샘플링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빅스의 라비는 노래<범(2021)>에 구성진 판소리를 랩과 조화시키기도 했다.
일러스트
세계적인 흐름, 너와 나 모두 같은 사람
일러스트
물론 K-POP, K-Music의 봄이 오는 데에는 변화된 세계 시장의 흐름도 한몫을 했다.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하고, 각종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움직임이 커지면서 라틴 아메리카 아티스트나 K-POP 아티스트 등 해외 아티스트들에 대한 주목도가 확연히 높아진 것이다. 스페인어로 된 노래 가 대중성과 상업성에서 모두 그 해를 상징하는 노래로 인정받을 만큼 미국에서 성공하고, 쿠바 태생의 가수 카밀라 카베요나 푸에르토리코의 가수 루이스 폰시와 배드 버니 등이 큰 인기를 끈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K-POP에서 싸이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단순히 그때에만 스치는 신드롬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되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전까지 싸이를 비롯해 서구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아시아인의 이미지가 ‘특이하고 웃겨서’ 신선한 그러나 ‘매력적이지는 않은’ 이미지에 치중해 있었다면, 오늘날 K-POP 아티스트들의 이미지는 기존 아시아인 이미지의 벽을 허물어 그들과 동등하거나 적어도 조금 다른 매력의 그것으로 온전히 변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높은 음악성과 잘 단련된 빼어난 퍼포먼스, 밝으면서도 과시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이들의 매력이 있는 그대로 통한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정치와 경제, 심지어 스포츠도 아니다. 절대적인 승패가 없으며 잘하고 못함의 객관적인 우열이 없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음악, K-POP이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는 문화의 일부로 스며들고 있으며 이를 통해 패션, 화장, 음식문화 등 한국의 다른 문화와 정서 역시 세계인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봄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 과실은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