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경주는
경주의 유물은 경주에 있어야 한다!
나라사랑이 문화재
보존으로 이어진
경주 만세운동
인터뷰 인터뷰   자료 자료제공 _ 경주제일교회
매년 3월이 되면 폭력에 맞서서 비폭력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에 맞서서 결연한 의지로 맞선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3·1운동이 가장 이름나 있지만 경주에도 경주만의 3·15만세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노동리 교회(현 경주제일교회)가 있었다.
교회 청년들이 시작한 이 만세운동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도 3월 15일 그 불꽃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경주의 만세운동은 다른 곳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그 후에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과
‘신라고적 환등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타 지역의 운동과 비교했을 때 가히 독보적이라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닌 고장 경주.
1919년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 자료를 정성스레 보존하고 있는
경주제일교회의 김태훈 선임 부목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매년 3월은 우리나라에 3·1운동이 일어난 달입니다. 당시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요. 특히 경주에서 일어난 3·15만세운동은 어떤 의미 혹은 특별함이 있을까요?
들불처럼 번져나간 3·1운동이 경주까지 미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주에는 5일장으로 2일과 7일에 ‘큰 장’이 열렸고, 4일과 9일에 ‘작은 장’이 열렸습니다. 경주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5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큰 장이 아니라 바로 작은 장이 열렸던 음력 2월 14일입니다.
원래 장꾼이 1만여명에 달하는 큰 장날인 3월 13일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전날 일본 경찰의 의해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결국 13일 새벽에 출동한 경찰병력에 의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작은 장날인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봉황대 주변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애국청년 박봉록(朴鳳祿), 서봉룡(徐鳳龍), 박무훈(朴茂勳), 최성렬(崔聖烈) 등의 주도하에 모인 장꾼들의 호응과 함께 만세운동이 재개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경주의 독립만세운동의 규모가 작아서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후에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과 ‘신라고적 환등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타 지역의 운동과 비교했을 때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을 비롯한 ‘신라고적 환등회’는 표면적으로는 계남학교 학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지만, 경주 3·15만세운동 이후 하나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역민들이 신라문화재를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독립운동에 상응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당시 노동리 교회당(현 경주제일교회)에 사월리에서 목회하시던 김기원 목사가 방문해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박내영 목사와 윤기효, 박문홍 영수님이 그 일에 큰 도전을 받아 3·15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셨습니다.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일제의 판결문
1919년 4월 15일 일제의 판결문.
당시 노동리교회(현 경주제일교회)의 방문홍 영수의 이름이 보인다.
3월 8일과 10일에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기로 도내 곳곳에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3월 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에서 목회하는 김기원(金基源) 목사님이 경주 노동리 교회당(敎會堂)을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김기원 목사님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박내영(朴來英, 이후 박영조로 개명) 목사님과 윤기효(尹璂涍) 영수 및 박문홍(朴文泓) 영수를 만나서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상세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박내영, 윤기효, 박문홍 세 사람은 뜻 있는 성도 대여섯 명과 더불어 3월 11일과 12일 밤 두 차례에 걸쳐 노동리 교회당에서 비밀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한 끝에 드디어 김성길(金成吉), 김술룡(金述龍)을 규합하여 3월 13일(음력, 2월 12일), 큰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지만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3월 15일(음력, 2월 14일), 작은 장날에 다시 살아나 마침내 경주 봉황대 주변을 울리며 천지를 진동시켰습니다.
박영조 목사
교인다수와 청년
경주제일교회 2대 담임 박영조 목사(1918 ∼ 1920), 3·1운동 경주지역 주도로 인해 징역 10개월을 살았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외에도 윤기호, 서봉룡(徐鳳龍), 박무훈 (朴茂勳) 김세득, 박귀주, 김남주, 윤겸식, 김철, 백선오등 경주노동리 교회(현 경주제일교회) 교인다수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가로 옥고를 치러야 했다.
Q 당시 경주 사람들은 만세운동뿐 아니라 금관총 출토유물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에 ‘경주 유치 청원서’를 내는 등 우리 문화재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도 했습니다. 여기서 노동리 교회 교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2년 반이 지난 1921년 9월 말에 경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도로공사와 택지개발로 인하여 노서리(路西里)의 언덕(후일 ‘금관총’으로 명명)에서 대량의 고대신라 왕족·귀족의 보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에 대해서 조선총독부는 경성(서울)에 이송, 경복궁 내에 설치된 총독부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려고 하였습니다. 총독부의 이 움직임에 맞서 ‘경주의 유물은 경주에 있어야 한다’며 경주 조선인과 거류 일본인이 힘을 합쳐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留置)운동’을 전개했고 해당 유물들은 경주박물관 ‘금관고’에서 보관·전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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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유치운동을 위해 건립된 금관고 : 경주주민의 모금으로 1923년 10월경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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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유물이 경성으로 이송하는 움직임에 대해
‘경주시민’이 반대운동을 벌인 소식을 전하는 기사.동아일보 1921.10.22. 기사/
당시 동아일보 경주지국과 경주청년회(1920년 3월 설립) 그리고 경주제일교회는 강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즉 ‘유치운동’에는 동아일보, 경주청년회와 함께 경주제일교회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1921년 10월 15일 총독부로 발송된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를 위한 청원서에는 3·15운동을 주도한 경주제일교회 영수(領袖) 박문홍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Q 경주제일교회는 물론 구한말 기독교는 독립운동의 불씨역할을 했는데요. 현재 교회 교인들이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잘 알고 있나요? 혹시 알려지지 않은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더 있는지 궁금합니다.
역사적으로 ‘경주 3·15만세운동’의 중심엔 경주제일교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2019년 3월 16일에 ‘경주 3·1운동 기념행사’를 경주시기독교연합회와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 지역에서 위상과 자부심이 더욱 더해졌습니다. 특히 경주 근대사를 연구하는 본 교회 성도인 아라키 준 박사님의 탁월한 연구가 뒷받침 되면서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3·15운동이 재조명되었습니다. 아라키 준 박사님은 이후 이어지는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운동’과 ‘신라고적 환등회’를 연결해 연구함으로써 경주 3·15만세운동이 단순한 만세운동이 아니라, 한국독립·민족운동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밝혀내었습니다.
Q 경주제일교회는 ‘독립운동 정신’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들을 해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경주시와 시민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경주제일교회는 해마다 3월에 ‘3·1운동 기념 예배’를 드림으로 교인들에게 100년 전 경주에 일어난 ‘3·15만세운동’을 기억하게 하고, 그 숭고한 믿음의 선조들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주시에는 ‘3·15만세운동’을 기념할 수 있는 가시적인 공간이나 기념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과거의 훌륭한 경주의 역사가 잊히기 전에 귀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계 부처나 역사 전문가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적 자료를 찾아 연구함으로 ‘3·15만세운동’의 역사를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