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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동리 교회당(현 경주제일교회)에 사월리에서 목회하시던 김기원 목사가 방문해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박내영 목사와 윤기효, 박문홍 영수님이 그 일에 큰 도전을 받아 3·15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셨습니다.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
1919년 4월 15일 일제의 판결문.
당시 노동리교회(현 경주제일교회)의 방문홍 영수의 이름이 보인다.
3월 8일과 10일에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기로 도내 곳곳에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3월 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에서 목회하는 김기원(金基源) 목사님이 경주 노동리 교회당(敎會堂)을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김기원 목사님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박내영(朴來英, 이후 박영조로 개명) 목사님과 윤기효(尹璂涍) 영수 및 박문홍(朴文泓) 영수를 만나서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상세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박내영, 윤기효, 박문홍 세 사람은 뜻 있는 성도 대여섯 명과 더불어 3월 11일과 12일 밤 두 차례에 걸쳐 노동리 교회당에서 비밀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한 끝에 드디어 김성길(金成吉), 김술룡(金述龍)을 규합하여 3월 13일(음력, 2월 12일), 큰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지만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3월 15일(음력, 2월 14일), 작은 장날에 다시 살아나 마침내 경주 봉황대 주변을 울리며 천지를 진동시켰습니다.
경주제일교회 2대 담임 박영조 목사(1918 ∼ 1920), 3·1운동 경주지역 주도로 인해 징역 10개월을 살았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외에도 윤기호, 서봉룡(徐鳳龍), 박무훈 (朴茂勳) 김세득, 박귀주, 김남주, 윤겸식, 김철, 백선오등 경주노동리 교회(현 경주제일교회) 교인다수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가로 옥고를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