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경주산책
경주 남산
글 글 _ 정호승     그림 그림 _ 남하임
경주 동남산 기슭 천년을 비바람 맞아온 감실 안에는 할매부처(마애여래좌상)가 곱게 자리 잡고 계시다.
몸이 성하든 성하지 않든 구별 없이 쓰고 고단한 보랏빛 인생에 노랗고 밝은 봄의 빛을 건네주는 할매부처.
눈이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봄의 따사로움과 위로를 정호승 시인의 시를 매개로 화폭에 담았다.

일러스트 남하임
경주 남산
정호승
봄날에 맹인 노인들이
경주 남산을 오른다
죽기 전에
감실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남산에 올라
안으로 안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실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
땀이 흐른다
허리춤에 찬 면수건을 꺼내 목을 닦는다
산새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다가
며느리가 싸준 김밥을 나누어 먹는다
감실 부처님은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맹인 노인이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 하고는
캔사이다를 마실 뿐
다들 말이 없다
-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비평사,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