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단풍에 취해 길을 잃다,
경주
글 글 _ 조은정 여행작가
인생의 대부분이 ‘여행’인 나에게 계절은 중요하다.
여행지를 선정할 때 계절과 그 풍경의 매치가 가장 먼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 년에 사계절이 주어지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중 나의 베스트 시즌을 손꼽자면 가을이다.
매년 가을이 오기도 전에 설레고 가을이 되면 심한 계절병을 앓으며 한껏 감성 모드로 빠지기도 하지만,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빨강과 노랑의 물결이 일렁이는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가을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던 해외는 뉴욕이었다.
리차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의 사랑 이야기가 뉴욕 맨해튼의 가을을 담았었는데
실제로 처음 갔던 뉴욕 여행이 마침 가을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의 여행지는 내게 경주였다.
식상하거나 혹은 진부하게 느껴질까 봐 다른 곳부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어찌 불국사를 빼놓고 가을의 경주를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찬란하게 화려한 가을의 불국사
과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천 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문화 유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후손의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이다. 한옥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양동마을, 바다 속에 자리해 더욱 놀라운 문무대왕릉,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아름다운 석굴암 등도 하나같이 모두 훌륭하지만 가을에 보는 경주라면 누가 뭐라 해도 불국사가 가장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불국사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 2009년 사적 제502호로 등록된 곳으로 현존하는 국내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도 유명한 불국사. 신라 법흥왕 15년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인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창건했고 경덕왕 10년째에 김대성이 낡은 사찰을 수리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불국사의 초입에 자리한 대웅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안양문, 자하문, 범영루가 보인다. 안양문은 극락전으로 통하는 중문이고 자하문은 대웅전으로 통하는 중문이다. 국보 제22호인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기도 전에 이미 아름다운 불국사의 모습에 흠뻑 취하게 된다. 경주를 대표하는 사진에서 늘 봐왔던 유명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내부로 걸어 들어가면 다시 터져 나오는 감탄사. 대한민국 국민 누구에게나 친숙한 다보탑이 눈에 띈다. 북적이는 인파들 속에서도 시선 둘 곳이 많아 눈동자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진다. 서로의 기념 샷을 찍느라 정신없는 이곳이지만 저 멀리 한 편에서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저마다의 가슴에 담긴 소원을 조용히 비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소문이지만 ‘기도발’이 잘 먹히는 곳이라는 불국사이니 이 자리에 선 누구라도 자신이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기원하고 싶어지는 건 어쩜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불국사에서 저무는 한 해를 떠올리며 나 역시 마음속으로부터 애타게 바라는 소원을 떠올려보았다. 다시 이곳에 올 때는 그 소원이 이루어져 있기를 기대해 보면서 말이다.
핑크빛 물결 속으로, 첨성대
울긋불긋한 단풍이 살짝 식상하다면 첨성대에서 만나는 핑크빛 물결과의 만남은 어떨까? 첨성대는 어느 계절에 가도 아름답다. 봄이면 유채와 메밀꽃의 물결로 뒤덮이고 여름이면 알록달록 백일홍과 해바라기가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2017년부터 시작된 가을의 첨성대 핑크뮬리는 최근 어마어마한 입소문이 났을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분홍빛의 솜사탕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경주에 처음 도착하면 상징처럼 보여지는 것 중 하나가 첨성대라 할 수 있는데 만약 핑크뮬리로 가득한 이곳을 보게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이 아름다운 공간을 향해 뛰어가게 될 것이다. 첨성대는 과거 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문대로 현재 국보 제31호로 지정이 된 곳이지만 세상 어느 나라 국보가 이토록 로맨틱하면서도 낭만적일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가을의 첨성대 앞은 언제나 연인들로 가득하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는 커플들의 간절한 염원이 저 멀리서부터 느껴질 정도. 그래, 그 마음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배는 아프지만 그들의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라며!
첨성대
길을 잃다, 대릉원
경주에서 내게 가장 아름다웠던 밤은 대릉원에서였다. 예정에 없던 밤을 그곳에서 보냈던 건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느라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후 허겁지겁 뛰어간 대릉원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대릉원은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답게 쉽사리 만나 뵙기 어려운 신라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늦은 밤 10시까지 매일 운영하며 영접할 수 있게 해준다는 놀라운 사실을. 나와 같은 관광객에게는 이 얼마나 큰 인심인지! 덕분에 나는 해가 지던 시간에 들어가 깜깜해진 밤에 그곳을 나와야 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과 조명 그리고 그에 반사되는 빛에 따라서 매 순간 달라 보이던 능과 능 사이의 곡선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아름다운 연못. 이 풍경에 취해 한참을 또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느라 바빴다. 주위를 둘러보니 담장 너머로 살짝살짝 보이던 황리단길은 어느덧 화려한 밤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게 되었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모두 소진된 것도 모른 채 그곳을 걷고 있었던 까닭이다. 가을밤에 취해 그리고 대릉원의 멋스러움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다행히 친절하던 현지 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출구를 찾아 나올 수 있었다. 그 가을밤 그렇게 왕들의 무덤가에서 길을 잃었던 기억은 지금도 내가 경주를 기억하는 가장 재미난 순간이 되어버렸다.
대릉원
인생은 지르는 자의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맞이할 이 가을도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시국이지만 이 또한 분명히 끝은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잦아드는 그때가 되면 내가 가장 먼저 향하고 싶은 곳. 그곳은 내게 경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