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고헌 박상진 의사 서거 100주기
國土未復…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글 글 _ 오미령     사진 사진 _ 박형준
사진 사진제공 _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헌법 제1장 제1조의 내용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았던 과거의 우리 국민에게는 ‘주권’도 ‘권력’도 없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나의 삶을 위해 현재를 잘 닦아놓는 자세가 필요해진 요즘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헌 박상진 의사, 경주에 잠들다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고헌 박상진 의사의 서거 100주기 추모제가 지난 8월 10일 내남면 노곡리의 박 의사 묘소에서 열렸다. 이번 추모제는 주낙영 경주시장을 비롯해 서호대 경주시의회 의장, 유족대표, 신라문화동인화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주낙영 시장은 추모사에서 박상진 의사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민족 정체성 확보와 민족정기 구현에 앞장설 것이라며 묘역 정비공사를 정성껏 추진해 박 의사의 높은 뜻을 기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의 고향인 울산시에서 추진 중인 서훈 상향이 꼭 이루어져 그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한 경주시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박상진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박상진 의사 묘 주변 정비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본 사업은 연말까지 묘역·진입로 정비 및 주차장 조성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며 내년부터는 인근 904호 지방도에서 묘역까지 진입로를 확장해 접근성을 높일 계획이다.
태극기랑 만세
만세
고헌 박상진 의사의 생애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밀양 박씨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해 네 살 때 경주 외동읍 녹동리로 이주했다. 1898년에는 월성 최씨 영백과 혼인하여 장남 경중과 장녀 창남을 품에 안았다. 이후 의병장 허위 문하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식민지의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사퇴했다. 1915년, 독립운동에 투신해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에 취임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18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21년 순국했다. 박 의사는 일제의 무단통치 시절 군자금 조달, 일제 세금마차 탈취, 금광 습격, 친일부호 처단, 신흥무관학교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길
생애
고헌 박상진 의사, 그리고 대한광복회
1910년 박상진 의사는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식민지의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평양법원이 아닌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지로의 여행을 택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느낀 건 1910년 8월 29일에 체결된 ‘한·일 합병조약’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슬픔뿐이었다. 박상진 의사는 그렇게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능가하는 군사력과 군사조직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등을 연락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다. 즉 겉으로는 무역업을 겸한 곡물상과 잡화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독립운동기지 및 자금조달기관으로 삼은 것이다.
1915년 박상진 의사는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신해혁명을 본보기로 삼아 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기본강령을 바탕으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이자 무장독립단체인 본 조직은 1916년부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한광복회의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는 박상진 의사의 스승 허위와 악연이 있는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과 친일파 박용하 암살 사건이다. 그러던 중 1917년 겨울부터 1918년 봄까지 대한광복회는 최대 수난기를 맞게 된다. 1918년 1월, 대한광복회 회원이었던 이종국의 배신으로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정체가 발각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일경에 체포된 박상진 의사는 옥살이를 하다 1921년 8월 11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38세의 일이었다.
묘 가는 길
묘
박상진 의사 절명시(絶命詩)
사형집행 전 만세삼창 후 지은 시 中

"두 번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룩한 일 하나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청산은 비웃고 물길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