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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chon Traditinal village

교촌마을

  • 경주최부자댁

    최부잣집은 400년 동안 9명의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는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1568~1636)장군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가암, 개무덤)에서 7대를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살아 12대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7대 남강 최언경(1743~1804)과 아들 용암 최기영(1768~1834)은 교촌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18세기 말 이조리에서 살던 집을 허물어 교촌마을 향교서편으로 옮겨와 현재 까지 살게 되었다.

    경주 최부자 12대 가계(家係)
    • 1대

      정무공 최진립

      (1568~1636)

      (가암파 파조)

    • 2대

      최동량

      (현감공,동파)

      (1598~1664)

    • 3대

      최국선

      (사옹원참봉)

      (1631~1682)

    • 4대

      최의기

      (1653~1722)

      교동계 파조

    • 5대

      최승렬

      (1690~1757)

    • 6대

      최종률

      (1724~1773)

    • 7대

      최언경

      (1743~1804)

    • 8대

      최기영

      (1768~1834)

      (용암, 생원)

    • 9대

      최세린

      (1791~1846)

      (대우, 생원)

    • 10대

      최만희

      (1832~1879)

      (진사)

    • 11대

      최현식

      (1854~1928)

      (둔차, 진사)

    • 12대

      최준

      (1884~1970)

      (문파, 참봉)

    최부잣집 육훈, 육연
  • 경주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주향교 자리는 신라시대의 ‘국학’이 있던 곳이다. 국학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세워졌는데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지방교육의중심 역할을 했다. 경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지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전통 유교의식인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나주향교와 함께 ‘전묘후학’의 건물 배치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 월정교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 ⇨ 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현재의 월정교는 10여 년의 복원공사 기간을 거쳐 201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목조다리이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단청으로 새로운 볼거리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