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장인을 찾아서 : 만파식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9-12-20
< 만파식적 > 경주의 장인 ․ 예인을 찾아서 - 대금 문동옥



구름 사이로 유유히 달,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에 은은하게 부서지는 엷은 달빛.
맑고 고즈넉한 밤, 단정하게 도포를 차려 입은 한 선비가 갓을 쓴 채 단아한 모습으로 정좌하고 있다. 그 어깨 위로 휘감기듯 끊어질 듯 흐르는 젓대가락.

어떤 가슴이
저 소리로 울려나는 것일까
저리고 시린 가슴
눌리고 맺힌 가슴
썩고 문드러진 가슴이
삭고 삭아서
몇 천 년을 또 그런 가슴 만나
울려나는 것일까
깊은 만큼 높고
흐린 만큼 맑게
이제야 흘러흘러
울려나는 것일까

한 시인은 대금소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대숲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저러한가. 대금 소리, 그것은 소리 죽여 흐느끼는 강물이다. 속울음 삼키며 돌아보는 세월이다.
이 세상의 한을 잠재우는 소리, 이 세상의 옹이며 모서리를 둥글게
끌어안는 소리.

대금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혼이 서린 악기로 국악에서 널리 사용되는 관악기로 저, 또는 젓대라고도 부른다.
대나무로 만들며 옆으로 부는 형태이다. 왼쪽 어깨에 얹어서 연주하기 때문에 연주자는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틀어야 한다. 동서양을 통틀어 이런 형태로 연주되는 유일한 악기.

궁중음악과 민요 연주에 모두 쓰이는 삼현육각의 하나이며, 요즘에는 현대의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에서도 대금이 자주 사용된다.
청아하고 구성지며 우아하여 합주뿐만 아니라 독주 악기로도 매우
이름이 높다.
거문고를 현악기의 최고로 친다면 관악기 중의 으뜸은 단연 대금이다.

대금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신라를 이룩한 신라 30대 문무왕이 왜구를 막기 위해 감은사를 짓다가 세상을 뜨고 난 뒤인 제31대 신문왕이 즉위한 이듬해, 동해 한가운데 갑자기 거북이 머리 같은 모습의 조그만 산이 생겼는데 그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한 개로 합쳐졌다.

이를 이상히 여긴 임금이 신하를 시켜 그 대나무를 잘라 옆으로 부는 악기로 만들었다. 이 악기를 불면 적병이 도망가고 병이 치유되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바다의 거친 파도가 잔잔해졌다. 신라에서는 이를 국보로 소중하게 여겼으며 만파식적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피리, 만파식적의 혼이 살아 숨쉬는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에는 대금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혼을 다하는 한 명인이 있다.

문동옥. 고 김동진 선생께 대금을 사사받아 김동진류대금산조를 보급해 온 대금산조의 명인이다. 경주 성건동에서 율맥국악연구소와 율맥대금공방을 설립하여 후학들을 기르는 한편 대금제작에까지 혼을 쏟고 있는 대금인생 문동옥 선생.

‘천년의 소리 만파식적’, ‘경주 만파식적제’ 등의 굵직한 행사를 주관하여 천 년 전의 소리를 오늘에 오롯이 펼쳐낸 바로 그 인물이다.

중요무형문화제 45호 이수자이며 죽관악기 기능전승자로, 김동진류대금산조보존회 회장으로, 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으로, 국악협회경상북도지회장으로, 그의 대금 인생에 붙여진 화려한 경력들이다.

문동옥! 그의 태생은 경주와 한참 먼 전북 정읍이다.
온 집안이 유교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어린 시절. 학교 대신 서당에 다니며 전통 복식에 댕기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런 엄격하고 독특한 전통을 고수하였기에 한국민속촌 개관 때 선발되어
온 식구가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민속촌으로 이주한 후 문동옥은 민속촌 안의 대나무 악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대금을 만드는 장인 신병문 선생을 만나 수제 악기 제작법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해,
문동옥은 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민속촌에 왔다가 악기공장에 들른 대금의 명인 김동진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대금 한 자락을 청해 듣게 되고, 넋이 나갈 듯한 그 소리에 매료되어 무작정 김동진 선생을 따라다니며 대금을 배웠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문동옥은 스승 김동진과 숙식을 함께 하며 밤낮으로 대금을 배웠다.

공부가 3년 쯤 되었을 무렵, KBS의 국악경연대회에 나가 연말 장원을 하게 되었다. ‘10대 국악인의 탄생’이라며 매스컴의 각광을 받으며 그때부터 본격적인 대금인생을 걷게 되었다.

1977년, 우연히 경주에 들렀다가 경주의 매력에 빠져 그만 눌러 앉아 버린 세월이 32년. 경주시립국악원에서 강사 생활부터 시작하여, 경주의 예인을 넘어 한국 명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경주는 그의 대금 인생의 깊고 너른 터전이 되어 주었다.

문동옥 명인은 대금 연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악기는 악기 연주자가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을 믿었던 그였다. 악기를 만듦으로서 음이 생겨나는 원리를 알게 되어 연주에 깊이를 더한다는 것.

대금을 만드는 일은 문동옥 명인에게 또 하나의 예술세계였다.
대금을 만들면서 쌍골죽의 신비함을 배웠고, 연주 못지않게 대금 만드는 일의 오묘한 재미를 알게 되었다.
대금산조의 명인, 누구보다도 대금을 잘 아는 사람이 온전히 손으로 제작한 대금. 그가 만든 대금은 금세 소문이 났고 여기저기서 제작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03년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죽관악기 부문 전승자로 선정됨으로써 대금의 연주와 제작, 양면에서 일가를 이룬 경주가 자랑하는 대가가 되었다.

신라의 피리를 불면 왜구가 도망가고 백성의 병이 치유되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거친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만파식적, 호국의 뜻을 지닌 대금.
그 대금을 대금의 본고장인 경주에서 직접 만들고, 불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문동옥.

경주를 사랑하고 경주에서 뿌리내린 대금 인생을 소중히 여기기에,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늘 애지중지 가지고 다니는 대금에도 '만파식적'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금을 만들고 불어온 지 32년, 대금을 제외하고서는 그의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여력을 연주자로, 제작자로서 대금 사랑에 더욱 완숙한 혼을 쏟고자 한다.
자신의 예술세계가 녹아든 새로운 대금산조를 엮고, 전통 수제 대금제작 방식이 후대로 영원히 이어 지도록 하는 것, 경주가 대금의 본향으로 대금제작의 산실로 길이 기억되도록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문동옥 선생의 간절한 바람이다.

풍류보다는 구도적인 냄새가 풍기는 악기, 달빛과 잘 어우러지는 악기.
떨림과 여울져 내리는 소리의 절묘한 조화, 그 소리에 특유의 가락이 얹혀 풀어 내리는, 영롱하나 가볍지 않고 부드러우나 유약하지 않으며 섬세하나 천박하지 않은 오묘한 소리가 문동옥 선생의 대금이다.

(인터뷰) 만파식적와 역사가치?
문동옥 선생님의 꿈(포부)?

세상의 온갖 파란과 고통을 물리쳐 주고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젓대, 세상은 아직도 만파식적의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문동옥, 그와 함께 경주는 천년의 소리, 만파식적의 꿈이 면면히 이어지는 대금의 본고장으로 우리 고유의 혼이 스민 찬란한 소리의 나래를 펼쳐 나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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