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장인을 찾아서 : 신라조묵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9-12-20
< 신라조묵 > 신라의 먹

깨끗하게 펼쳐진 화선지 위에 함뿍 먹을 머금은 붓이 지나간다.
때로는 단숨에 내려가는 힘으로, 때로는 스치듯 갈필이 지난 간 자리, 먹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진한 묵향을 남긴다.

먹으로 쓴 글씨는 태워도 종이만 없어질 뿐 재 속에서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만큼 질긴 생명을 가진 것이 먹이다.
천년의 흔적을 만드는 그을음의 신화, 먹!

먹은 옛부터 서가의 으뜸이라고 했다. 옛날, 선비들에게 필수품이며 목숨과도 같이 귀하게 여겼던 종이, 붓, 먹, 벼루. 이른바 문방사우는 4가지 중 어느 것 하나만 빠져도 안 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중에서도 제 몸을 갈아 글씨나 그림 등 새로운 형상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먹이다. 마치 스스로 몸을 태워 빛이 되는 촛불과 같은 존재이기에 먹은 무생물이면서도 생명있는 것들보다 더 오래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며, 그래서 서가의 으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먹이 사용되었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대로부터 먹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신라시대부터 비로소 질 좋은 정품먹이 생산되었다. 일본 정창원에는 신라의 먹이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먹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의 먹이 일본보다 훨씬 앞선 역사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긴 역사에 비해 우리의 먹은 위태롭게 그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나라 전체를 통틀어 먹 만드는 곳은 현재 3~4곳 뿐이다.

여기 신라먹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 오늘날 최고의 명품 먹을 만드는 장인, 한국 먹 기능 보유자가 있다.
5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먹만들기 외길 인생길을 걸어온 경주시 건천읍 조전리 신라조묵사의 유병조 씨!

13세에 먹 만드는 일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오로지 좋은 먹 만들기, 신라먹의 맥을 잇기 위한 외로운 작업에 온 생을 바쳐온 유병조씨다.
1965년 경주에서 가내공업 형식으로 먹공장을 열고 그때부터 직접 기구를 만들고 까다로운 건조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 등 명품먹을 만드는데 장인정신을 발휘해오고 있다.

이로써 경주의 또 다른 브랜드가 된 유병조 씨의 신라먹은 긴 역사와 훌륭한 제묵법(製墨法)으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에 재현하고 있다.
상처 입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관솔의 그을음이 최고의 먹을 만들어 내듯 어렵게 지켜낸 그의 먹 인생은 우리나라의 문방사우를 지켜내는 자존심이다.

먹의 주성분은 그을음이다. 이 가벼운 그을음을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교이고, 여기에 먹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향을 첨가한다.

먹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좋은 먹은 최고의 그을음을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을음 채취, 아교녹이기, 반죽, 형틀성형, 건조, 가공, 광택, 글씨 새겨넣기 등 7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그을음 채취과정을 빼고도 45일이 걸려야 만들어지는 먹!

그을음과 아교를 혼합해 만드는 먹은 여름철에는 아교 특성상 빨리 쉬어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또한 겨울철에는 잘 마르지 않아 애를 먹기 때문에 봄, 가을철에 만드는 것이 제일 적당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 아무리 잘 만든 상품도 기온이 맞지 않는 등 조건이 잘못되면 90%이상 완성된 먹이 하루 아침에 깨져버리거나 굽어버리기 일쑤다.

나무껍질을 태워 그 그을음으로 만들어내는 송연묵의 향기는 10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몸가짐도 철저히 해야 하는 장인의 땀과 혼, 하늘이 조화를 이룰 때야 비로소 좋은 먹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경주의 먹, 신라먹은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찌꺼기가 없으며 색이 맑아 붓이 잘 내린다.
묵향이 은은해 집중이 잘 되고 벼루에 갈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일품이며 너무 검지도 희지도 않은 먹물의 빛이 고아하고 아름답다. 2005년 해인사 팔만대장경 탁본 먹물 20말을 만든 것도 바로 신라먹이었다.

현재 신라조묵사에서 만들어진 먹의 판로는 서울 인사동을 비롯한 전국 유명 필방이다. 신라먹의 기술력은 300년 역사를 지닌 일본의 고매원을 능가하는 제묵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

먹색이 맑고 은은한 묵향이 배어 나와 한번 써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는 신라먹! 특히 송연묵은 유리판 위에서도 부드럽게 잘 갈리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신비함을 지녔다.

우리 먹의 역사를 남기는 것, 더 나아가 우리의 먹 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하다는 걸 알리는 것, 바로 경주의 도 다른 브랜드인 신라먹의 역할이자 미래이다.

서라벌의 빛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 신라천년의 향기 그윽한 경주!
그 그윽함 속에는 우리나라 문방사우를 지켜내는 자존심, 전통먹 기능보유자가 혼을 담아 빚어내는 신라 송연묵의 은은한 천년 향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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