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장인을 찾아서 : 신라토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9-12-20
< 신라토기 > 경주의 장인 -신라토기(류효웅, 배용석)


표주박주전자, 주름무늬병, 달개장식뿔잔…….
이름도 정겨운 토기들, 한곁같이 진회색에서 검은색에 가까운 빛깔들이다.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살짝 두드려보면 뜻밖에도 쇳소리가 난다. 바로 천년의 역사와 신비를 간직한 신라의 토기다.

경주의 수많은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토기들!
고려에 청자가 있다면 신라에는 토기가 있다.

신라토기는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무려 천년 동안이나 사용되어 왔다.
색깔은 회청색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들거리며 윤이 나는 것도 있다. 가마 속에서 구워 낼 때의 솔잎재로 인하여 생긴 자연유가 덮였기 때문이다.

형태는 용도에 따라 일상 생활용품인 장경호, 고배, 각배, 영배 등이 있고 동물, 배, 수레, 등잔모양의 특수한 목적의 이형 토기와 죽은 자를 위한 골호도 있다.
가야토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토우장식토기와 상형토기가 신라토기에도 많으나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뚜껑에 동물이나 인물을 조그맣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 신라토기만의 특징이다.

신구형토기, 차형토기, 기마인물토기 등은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등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명품들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제작기술은 물론, 신라인의 삶과 얼이 그대로 담긴 명기들이다.

신라토기는 어떻게 탄생될까.

신라토기는 반드시 전동 물레가 아닌 전통 방식 그대로 발로 힘들게 물레를 돌려 토기를 빚어야 한다.
그렇게 빚은 토기를 가마에 앉힌다. 가마는 4박 5일간 쉬지 않고 불을 때야 한다. 토기의 완성은 불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가마 구멍으로 불을 보며 온도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가마에 불을 지핀 5일 내내 도공은 사뭇 긴장 속에서 보낸다.

불을 다 땐 5일째, 가마의 모든 구멍을 꽉 막은 뒤 또 다시 닷새를 기다린다.
그 5일의 시간 동안 깊은 침묵 속에서 토기는 가마 속의 재와 연기를 온몸으로 흠뻑 빨아들인다.

이후 가마의 재를 끄집어 낸 뒤 다시 구멍을 막고 가마가 온전히 식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또 열흘이다.
가마에 불을 붙인 지 20일, 고된 땀과 오랜 기다림을 고스란히 견디어 낸 후에야 비로소 신라토기는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년 고도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경주 민속공예촌!
우리 민족의 얼과 멋과 솜씨가 깃든 전통민예품을 옛 모습대로 재현시켜 놓은 곳이다. 이곳에 토기의 비밀을 밝혀내고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신라토기를 오늘에 재현해내는 명장 류효웅 씨와 배용석 씨가 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 사용하여진 신라토기를 오늘에 재현해내는 토기 명장 류효웅 선생과 배용석 선생은 평생을 토기예술에 쏟고 있는 최고의 작가이다.

경주가 고향인 류효웅 씨.
3대에 걸친 옹기도공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흙과 친해지던 차에 1961년 본격적으로 도예에 입문하여 토기제작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옛 조상의 지혜와 얼이 담긴 토기를 그대로 되살려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교본이나 기술을 배울 수도 없을 뿐더러 출토된 유물을 직접 보기도 힘든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수년간의 실패와 시행착오가 계속되었다. 경기도 포천에 옛날 시루를 굽는 데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가 5년 동안 연구에만 매달린 적도 있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1972년 신라요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라토기 제작에 들어갔다.

차츰 그의 열정과 명성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의 관광객의 발길이 신라요를 찾았다.
지금까지 작품전도 여러 번 열었다. 한국도예 5인전 등 일본에서 열린 굵직한 도예전에도 참여하였다. 전국 규모의 도자기에서 입상하고 1991년 노동부부장관 표창, 2000년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도자기 명장 류효웅!
그가 오늘날 명장의 칭호를 얻기까지는 평생을 흙과 함께 신라토기에 바친 무수한 땀과 눈물이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토기는 창작이 아니라 단지 재현일 뿐이라면 겸손해 하는 류효웅 선생에게서 신라인의 정신과 문화를 느낀다.

또 한 사람의 도자기 명장, 신라토기 제작 명장 제9호 배용석 선생!
그는 1956년, 18세의 나이에 도자기 제작에 입문하게 된다. 4대째 가업을 계승하여 옹기를 만들어 오던 중 신라토기 재현에 심혈을 기울여 1982년 경북공예품 경진대회,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 등에서 입상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도자기 명장에 선정되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현재 경주민속공예촌 내의 도자기 공방 보산토기를 운영하면서 신라토기 재현에 혼신을 쏟고 있다.

그의 신라토기 사랑은 특별히 각별하다. 단순히 토기의 재현을 넘어 보산토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신라토기의 제작 체험을 가르치면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일깨우고 보급 확산하는 데 힘쓰고 있다.

토기 명장 배용석 씨는 말한다.
흙으로 만들 수 있는 모양은 다양하며, 내가 원하는 모양은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어 무한한 독창성과 집중력, 관찰력을 높이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바로 토기 제작 체험이라고.

화학재료를 사용한 플라스틱 용기에는 렙이 달라붙지만, 토기에는 렙이 붙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신라토기는 나무로 굽고, 나무로 구운 토기에는 산소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라며 토기의 우수성을 거듭 강조하는 배용석 씨.

토함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경주민속공예촌의 보산토기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배용석 명장과 함께 신라토기 제작의 소중한 체험을 하고 있다.

고아한 듯 투박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정교한 멋을 담고 여기에 흙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신라토기!
그 토기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찍부터 그 전통을 되살리려는 류효웅, 배용석 두 명장에 의해 오롯이 되살아나고 있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는 그것을 찾아내고 미래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을 때 그 찬란함과 가치는 되살아나는 법이다.

신라토기의 재현에 온 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 토기 명장 류효웅 선생과 배용석 선생이 있기에 신라인의 뛰어난 지혜와 토기를 예술적 경지로까지 끌어낸 신라 장인의 넋은 영원히 우리 앞에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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