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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띠의 해
계묘년 토끼이야기

2023년 계묘(癸卯)년을 맞아 토끼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계묘년을 검은 토끼띠의 해라고 하는데 십간에 해당하는 계(癸)는 북방에 해당하고 오행에서는 물(水)을 상징하며, 방위색은 검은색을 상징하니 이로 인하여 검은색의 계(癸)와 토끼띠에 해당하는 묘(卯)를 합쳐서 검은 토끼띠의 해라고 하는 것이다.
해당하는 달은 음력 2월인 묘월(卯月)이며, 시간으론 오전 5시 ~ 7시, 방향으론 해가 뜨는 정동 쪽에 해당한다. 해가 막 뜨는 시간이며, 만물이 잠에서 깨는 봄을 뜻한다.

이채경 학예연구관(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전 세계에 사는 30종이 넘는 토끼를 크게 구분하면, 가축화된 굴토끼류(穴兎類)인 집토끼(rabbit)와 흔히 산토끼(hare)라고 부르는 야생토끼로 나눌 수 있다. 산토끼는 집토끼보다 몸집이 크고 귀도 길다. 사실을 말하자면, 집토끼와 산토끼는 ‘종(species)’을 넘어 ‘속(genus)’이 다르다. 염색체 수도 집토끼는 22쌍, 산토끼는 24쌍이다. 이 정도면 둘은 양과 염소, 인간과 침팬지만큼이나 다른 셈이다. 따라서 집토끼와 산토끼는 서로 간에 번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영어로 따지면 다른 동물이지만 한국어로는 둘 다 토끼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산토끼만 살았고 그것을 토끼라고 불렀지만, 유럽에는 산토끼와 집토끼 모두가 살아서 두 동물을 구별하는 문화가 생겼다.
따라서 한국의 설화에 등장하는 모든 토끼는 집토끼가 아니라 산토끼이다.
한국에서 토끼를 기른 건 가죽과 털, 고기를 얻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한반도에 유럽에서 가축화된 토끼를 들여온 건 일제였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산토끼는 집에서 기를 수 없었고 길들일 수도 없었다. 다이쇼시대(大正, 1912 ~ 1926)에 들여온 집토끼는 풀을 뜯어서 주면 되었기에 거의 모든 한반도 농가로 퍼져나갔다.시골 어른들은 새끼를 낳을 무렵 토끼장을 컴컴하게 덮어주지 않으면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인다고들 했다. 굴에 살던 습성과 갓 태어난 새끼들이 열흘 가까이 눈을 뜨지 못하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일본에서 집토끼가 널리 퍼진 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기간이었다. 단백질원과 전투용 방한 모피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육이 본격화되었다. 군국주의로 치달아가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 권력은 일반 농가에 이를 강하게 요구했다. 집토끼는 전투 식량이자 국민 식량이었고, 털이 붙은 가죽은 대륙 침략에 나선 일제 군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 강추위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궁지에 몰린 일제 군부는 고양이, 족제비, 하물며 쥐까지 군용으로 잡아들여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집토끼를 기르는 건 수월한 일이었다.
일제는 어린이들이 토끼를 기르는 건 동심과 유대관계를 형성케 하는 등 정서에 좋다며 널리 장려하였다. 이 집토끼들이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제 군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데 일조했단 사실을 알았다면, 식민지 시대 한국 성장세대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어쨌든 한국은 광복 후에도 이같은 교육 방향을 지속했다.
나도 어렸을 때 닭장 위에 토끼장을 얹어 집토끼를 길러 새끼를 낳아 젖을 떼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었고, 가끔씩은 큰 토끼를 잡아서 고아 먹기도 하였다. 처음에 길렀던 토끼는 눈 이 빨갛고 털이 흰색인 품종이었는데 ‘일본백색종’이라고 들었다. 그러다가 회색토끼를 길렀는데 이놈은 품종이 ‘친칠라종’이라고 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흰토끼나 회색토끼보다 좀 더 큰 갈색토끼를 길렀는데 품종은 모르고 크다는 의미로 말토끼라고 불렀는데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벨기언종’이었던 듯하다.
닭장 위에 토끼장을 얹은 이유는 토끼 오줌에 강력한 살균 효과가 있어 닭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겨울이 되면 동네 형들을 따라 산과 들에 덫과 약을 놓아 꿩과 산토끼를 잡았다. 아마도 해마다 겨우내 수십 마리씩은 잡았을 것이다. 가난하여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거의 유일한 단백질 보충 수단이었다.그런데 요즘은 꿩은 여전히 많이 보이는데 산토끼는 전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산토끼란 놈은 깊은 산이 아니라 인가와 가까운 야산에 주로 서식한다. 그때는 흔하디흔하던 산토끼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언젠가 누군가가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길냥이들이 많아지면서 산토끼가 멸종되어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길냥이들이 산토끼의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먹기 때문이란다. 상당히 일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끼띠 해인 계묘년에는 산토끼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산토끼 대신 경주에서 토끼를 만날 수 있는 문화유적은 여러 군데 있다. 신라시대 능묘의 십이지신상으로 조각된 이미지가 대부분이지만, 아이들과 토끼찾기 게임은 어떨까싶다. 성덕왕릉(조양동), 경덕왕릉(내남면 부지리), 원성왕릉(외동읍 괘릉리), 헌덕왕릉(동천동), 흥덕왕릉(안강읍 육통리), 진덕왕릉(현곡면 오류리), 김유신묘(충효동), 방형분(구정동), 능지탑(배반동), 황복사지(구황동), 원원사지 삼층석탑(외동읍 모화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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