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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경주

나라를 위해 기술을 감춘
신라의 쇠뇌(弩) 기술자 구진천(仇珍川)

이채경 학예연구관(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히스토리 경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弩師] 사찬(沙湌)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돌아갔다. (당나라에서 구진천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화살을 쏘자 30보(步) 날아갔다. 황제가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나 날아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구진천이) 대답하기를, “재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국의 재목을 가져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니, 곧 대나마(大奈麻)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이에 다시 만들 것을 명하고, 쏘아보니 60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신 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건너면서 습기에 젖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무거운 벌로 위협하였지만, 끝내 그 재능을 다 바치지 않았다.

구진천은 기계 활인 쇠뇌(弩)를 만들던 신라의 기술자로, 너무나 뛰어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나라로 불려갔다. 당나라가 탐을 낸 기술자 구진천, 그는 누구인가?
구진천이 정확히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통합시키던 시기에 활약했다. 그의 최종 관등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8위 사찬(沙湌)이었기에 그의 신분은 6두품이었을 것이다. 구진천이 만든 쇠뇌(弩)는 방아쇠를 사용하여 화살을 발사하는 활이다. 활은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제대로 활시위를 당겨 쏠 수가 있다. 반면 쇠뇌는 발과 두 손을 이용해 활시위를 당겨 고정해 놓고, 화살을 걸고 방아쇠를 당겨 쏠 수가 있기 때문에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이라도 쉽게 사용할 수가 있다. 물론 활에 비해 사격 속도가 느린 단점은 있다. 하지만 쇠뇌는 활에 비해 화살을 더 멀리 날려 보낼 수가 있고, 목표물을 뚫는 관통력도 강하다. 연노(連弩)의 경우에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적에게 한꺼번에 연속해서 화살을 퍼 붇거나(연발식), 여러 개 화살을 동시에 발사(다발식)할 수가 있다. 또한 상자노(床箱子)는 쇠뇌를 대형화시켜 발사대나 차량에 탑재시킨 것으로 투석기, 대포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쇠뇌는 처음 누가 발명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5세기 중국에서 널리 사용된 바 있다. 7세기 당나라 군대는 전체 병사의 약 20%가 쇠뇌로 무장을 하기도 했다.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534~576) 19년(558)에 나마(奈麻, 11위 관등) 신득(身得)이 포노(包弩)를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포노는 상자노와 같이 성을 방어하기 위한 쇠뇌로 대포와 같이 멀리 화살을 날려 보낼 수가 있다. 진흥왕은 신득이 만든 포노를 성 위에 비치하여 방어용 무기로 사용하게 했다.
구진천이 만든 쇠뇌는 1천 보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이러한 쇠뇌는 신라가 적과 상대할 때 대단히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관문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669년 겨울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면서 노사(弩師) 구진천을 당나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신라는 이때까지 당나라와 싸울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가 구진천을 데려간 것은 장차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마저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의 계획을 알고 670년 3월 신라가 당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진천은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구진천에 관한 기록은 오직 <<삼국사기>> 기록에만 등장한다. 그가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가 변절을 해서 당나라에 협조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후 당나라가 1천 보나 나가는 쇠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대규모 기병을 동원했다. 675년 9월 신라군이 매소성에 주둔한 당군을 물리치고 3만여 필의 말을 노획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가 동원한 기병은 거란, 말갈 출신으로 말을 타는 데 능숙했다. 신라는 672년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창설하는 등 당나라 기병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신라의 장창부대는 창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아니다. 창은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며 속도를 줄이는 데 사용된다. 기병이 속도를 줄이면 창병 뒤에 있던 노병과 궁수들이 화살을 날려 적을 죽이는 것이다. 신라의 각 부대에는 많은 수의 쇠뇌를 다루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신라는 당나라의 강력한 기병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기술에는 조국이 없지만 기술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신라의 쇠뇌는 당나라의 무서운 기병을 막는 최고의 무기였다. 만약 신라에 구진천과 같은 기술자가 없었다면 과연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당나라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까. 신라의 삼국통일은 구진천과 같은 기술자들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구진천은 자신의 출세를 버리고, 목숨을 버려가며 나라를 위해 신라의 기술을 지켜냈다. 구진천이 만든 뛰어난 성능을 가진 쇠뇌를 당나라 병사들이 손에 쥐었다면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구진천은 자신이 만든 쇠뇌에 의해 신라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신라에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는 자신의 기술을 끝내 감추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적 기밀, 산업의 노하우가 외국에 유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과 같은 사람들이 더욱 생각난다.

경주시에서는 지난 2016년 7월 29일부터 7월 31일까지 3일간 문무대왕릉 앞 백사장에서 ‘경주 문무대왕 실경뮤지컬 만파식적’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뮤지컬은 역사책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구진천을 불러내어 무대에 세웠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감동적인 공연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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