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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발굴 50주년에 다시 돌아보는

천마총 발굴 이야기 두 가지

금년은 천마총을 발굴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5월 4일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5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천마, 다시 만나다>라는 주제로 천마총 발굴 5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에 천마총 발굴 당시의 이야기 두 가지를 간단히 소개한다.

이채경 학예연구관(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천마총

1971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이 지구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한 표형분인 제98호분(황남대총)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기초로 복원해 내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시책도 마련됐다. 제98호분은 규모도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이만한 완형분을 발굴한 예가 없어 경험쌓기용 발굴대상으로 선정된 고분이 제155호분(천마총)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문화재연구담당관 김정기를 단장으로 김동현, 지건길, 박지명 등 조사원 4인과 윤근일, 최병현, 소성옥, 남시진 등 보조원 4인으로 이루어진 조사단을 구성했다.
천마총은 1973년 3월 21일 16시에 위령제를 지내고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평면적인 지하유구조사와 외부실측을 마치고 4월 6일 아침 간단한 위령제 후 무덤의 봉토제거작업이 시작됐다. 10월 6일까지 현장조사가, 12월 4일 주변조사까지 마무리되면서 155호 고분의 모든 조사가 완료됐는데 우리나라 발굴역사상 실측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7월 25일 저녁에 금관이 노출되기 시작해 27일에 수습해 유물상자에 옮겨담았다. 이 해는 가뭄이 극심했는데 왕릉을 파헤쳐서 가뭄이 들었다며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수습한 금관을 담은 유물상자를 옮겼던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윤근일은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퍼붓자 혼비백산하여 유물상자를 그 자리에 도로 내려놓은 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수습한 금관의 세척을 끝냈을 때 밤하늘은 맑아져 있었다. 7월 28일 금관이 나왔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람이 와서 빨리 청와대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8월 1일까지 금관 등 주요 유물의 서울 이송을 위해 간단한 실측과 촬영을 마쳤다. 당시 금관을 가지고 간 사람은 경주사적관리소장 정재훈 씨다. 만약을 대비해 2대의 차량으로 밤새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금관을 옮기던 차가 대구 쯤에서 고장이 나 다른 차에 옮겨 싣고 8월 2일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금관을 보이고 세계적인 출토사례와 특성 등을 설명했다. 8월 15일에는 부장품수장궤에서 투조금동판피죽제장니 2점이 확인돼 경화처리 후 8월 22일 수습했고, 그 밑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가 채색된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가 나타났다. 2매가 한데 겹쳐 있었다. 천마도 발견 당시 발굴단이 느낀 감정은 환희만이 아니다. 김정기 발굴단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일종의 공포라고도 할 수 있는 불안, 그리고 깊은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세계적인 대발굴이었다. ‘신라의 예술혼이 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 있었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환희의 절정에 달한 순간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천마도를 무사히 발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발굴 과정에서 형태를 지니고 있던, 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돼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감쪽같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는 “잠시 후 가늘었던 균열이 눈에 보이게 굵어졌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고 했다. 천마도의 색이 거무튀튀하게 변하기 시작하자 김정기 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작업을 중단시키고 곧장 수습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대칼 여러 개를 장니 밑으로 끼워넣고 여러 장의 함석판들을 장니 밑으로 깊이 쑤셔 넣었다. 발굴단은 천마도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수습된 장니가 바로 각종 역사서에 수록된 그 천마도다. 김정기 단장은 천마총 발굴 회상기에서 “내 머리카락이 지금과 같이 희게 된 것도 아마 이 시기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천마총은 보존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장에 도입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 현장이었다. 모든 천마도를 수습한 날이 1973년 8월 23일. 천마도는 그 다음날 곧바로 서울로 수송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 28일까지 응급 보존처리를 했다.
발굴단원들도 이후 오랜 세월 천마도를 만나지 못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도라고 전시한 유물이 존재하긴 했으나 진본을 모사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진본 천마도 두 세트 4점을 모두 공개한 것은 2014년이다. 발굴단원들에게는 41년 만의 재회였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발굴 50주년 기념 특별전에 재공개 중이다.
5 ~ 6세기에 선조가 남긴 유물이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분말로 변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줄곧 시달렸던 김정기 단장은 모든 조치가 끝난 뒤에야 이렇게 말했다. “장니에 그려진 하늘을 날 듯한 천마, 그 천마는 우리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지 않았다. 오늘도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더 큰 비상을 꿈꾸고 있다.”
금관, 천마도를 비롯한 1만1,5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된 천마총은 발굴 1년 만인 1974년 12월 26일에 발굴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가 발간됐다. 제155호 고분으로 불리던 고분에서 천마도가 발굴됨으로써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의결에 따라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발굴 현장에서 같은 조사보조원으로 동고동락한 소성옥 씨와 연분이 나서 나중에 부부가 되었다. 1975년에 제98호분(황남대총)의 발굴조사도 완료됐으나 당초 계획을 변경해 천마총을 재단장해 내부 공개를 하기로 했다. 1976년 6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천마총 복원정비사업 준공식이 치러졌고, 다음날부터 국내외 관광객에게 공개됐다. 이후 41년 만인 2017년 9월 17일부터 2018년 7월 27일까지 10월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천마총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고 있다.

천마총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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