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本 경주
나의 경주
시간여행자
예순이 넘은 엄마가 안경을 들어올리며 눈물을 훔친다.
“얼마나 추억이 많은 곳인데, 인제 문 손잡이를 자물쇠로 묶어뿌드라, 내도록 거기서 태화강도 가고, 해운대도 가고 했는데 인자 뭐 타고 다니노, 인자 어디를 가노!”
* 독자투고 경주시 용강동 김미란 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2021. 12. 28.
경주역이 폐역이 되었다.
그날 어느 방송에서는 역사 출입문을 닫고 걸쇠를 거는 장면을 내보냈다고 한다. 소녀 심성을 가진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그 장면에 소회가 깊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학창 시절, 해맞이를 보러 가겠다고 어두운 새벽 집을 나와 대합실에 머물면서 발이 시려 석유난로 가까이를 지켰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보다 더 어릴 때엔 관사라고 불리는 마을을 지나 경주역 철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걸어 시장 나들이를 다녔다.
음산하면서도 웅장하게 서 있는 급수탑은 라푼젤의 성처럼 비밀스럽게 보였는데,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던 1920년대에 만들어진 시대적 산물로 보일러를 가동시켜 증기로 동력을 만들어야 했던 때, 다량의 물을 보관했던 대형 물탱크이다. 주요 거점역마다 설치되었던 것이니만큼 경주역이 중요한 위치였다는 것이 급수탑의 위용으로 증명이 되는 셈이다.
육교 계단을 꾸준히 올라가면 경주역 전체를 볼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있다. 기와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경주역사,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철로는 지평선 끝을 향해 내달리고, 멀리서 오는 기차를 기다렸던 플랫폼 그곳엔 얼마나 많은 아쉬움과 설렘들이 부유했었던가.
나는 곧 출발하는 객차 지붕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보기로 한다.
멀리 산, 하늘, 구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기차가 일으키는 소음,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이 반가워 양팔을 날개처럼 활짝 펼쳐본다.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해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지고,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먼지 냄새도 정겨웠다. 그렇게 시장가는 길은 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엔 갖고 싶은 거 하나 사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하게만 느껴져 입이 툭 튀어나온다. 풍경은 고사하고, 육교를 오르내리는 긴 시간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최근에 황오 지하도가 메워졌다고 해서 한번 가보았다. 경고지하도라고 불리던 이곳은 폐지를 산더미처럼 쌓아 리어카를 끌고 느릿느릿 가는 어르신들이 있어 상습 정체구간이 되었던 곳이다. 아스팔트로 새 단장한 도로는 우범지대 이미지는 사라지고 지역의 명문 경주고등학교까지 직선도로가 눈앞에 펼쳐져 생경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마치 한 마을의 역사가 일단락되고 새로운 시작의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경주역 동편은 황촌마을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한창이다. 마을을 걸어다니면서 골목길마다 겹겹이 쌓인 세월의 이야기에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황촌 게스트하우스가 준공이 되어 마을호텔이 생기고, 마을카페, 마을부엌이 오픈되어 운영 중이다. 지역민이 주도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마을활성화 사업을 하는 것은 개인주의화가 극심한 시대흐름과 달리 ‘우리’를 중요시하는 연대 의식의 발현으로, 이곳의 주민자치 선진화 실현에 감명을 받았다.경주의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한 황리단길의 다음 타자는 북적거리지 않는 여유와 사색의 공간, 이곳이 될 것이다. 좁은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탐험하듯 걷다보면 소담스럽게 자리한 숙소, 카페, 주점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선 모두가 자유롭고 홀가분해진 제 마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누구보다 두텁고 묵직한 세월을 지나온 나의 엄마.
그날 엄마가 흘렸던 눈물은 지난 시간 속 자신에 대한 아련함일 테다.
시간은 미완성인 채로 흘러가서 과거가 되어 버리지만,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그 자체로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망설이고 미뤘던 과거의 공백을 채워 재탄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현재 역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될 것이기에 너무 아쉬워하지 말지어다.
시간은 계속해서 내게 오고 있고, 지금 내가 밟고 올라서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엄마 손을 잡고 육교를 건넜던 나는, 이제 중학생이 된 딸아이의 교복을 찾으러 그 길을 다시 걷는다.
길은 변함없이 자리에 남아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경주,
아름다운 이곳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철로처럼
알 수 없는 시간의 여정을
어제와 같이 꾸준히 내달린다.
내가 그러하듯,
나를 닮은 우리 아이가
천년의 이야기에 또 얇은 한 겹을 덧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주를 다녀간 당신의 발걸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오게 될 그들의 걸음 또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