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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주

신라문화의 품격
‘진평왕릉’을 둘러보고

* 독자투고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정석준 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진평왕릉

진평왕릉

소박하면서도 위용이 남다른 진평왕릉

경주 시내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길 오른편에 보문마을이란 푯말이 보이고 들판 사이로 보이는 길을 따라 조금만 가다 보면 보문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으로는 왕버들, 포구나무, 소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고, 그 끝자락에 진평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진평왕릉은 허허로운 벌판에 있는 능이다. 신라왕릉 가운데 평지에 있는 능은 여럿 있으나 벌판에 자리하고 있는 능은 오직 진평왕릉뿐이다. 왕릉의 지름은 38m이고, 높이는 7.6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흙으로 덮은 무덤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 석렬(石列)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몇 개뿐이다.
그러기에 겉모습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맛이 일품이다.
정양모 선생(전 경주국립박물관장)은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장항사 절터, 에밀레 종소리, 진평왕릉, 이 세 가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이곳에 와보니 그 말씀이 더욱 와닿는다. 진평왕릉은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처럼 봉분이 우람하지도 않으며, 김유신 장군묘나 괘릉처럼 12지상, 무인상, 돌사자, 호석과 돌난간도 없다. 그러면서도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고 당당한 위세를 보이면서, 마치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따스한 정감을 주고 있는 능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으로 24대 진흥왕의 손자이며 선덕여왕의 아버지이다. 진평왕은 12세에 즉위하여 54년이란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수많은 침공을 막아냈으며, 남산성을 쌓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왕경 방어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중국의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도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열어갈 수 있는 안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월정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 선덕여왕이다. 덕만(선덕여왕의 이름)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성골의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순전히 그가 성골이었기에 왕위를 이어 받았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언니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편>에 의하면,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나 진지왕의 두 아들(용수와 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 덕만과 함께 궁궐에서 자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명공주는 용춘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신라 사회에 숙부와 조카 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용춘은 공주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었다.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남자 중에는 용숙(龍叔)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용수와 용춘 중에서 ‘젊은 아재(叔)’란 뜻으로 용숙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야왕후가 이를 잘못 알아들은 탓에 천명공주는 짝사랑하던 용춘이 아닌 형 용수의 아내가 되고 말았다.
천명공주가 출궁함으로써 왕위는 자연히 용춘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선덕공주(덕만)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언니가 즉위한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용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없다.”면서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使臣)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진평왕은 선덕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이 정도의 배포라면 왕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선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진평왕릉 맞은편에 있는 선덕여왕릉

진평왕릉 맞은편이 낭산이고, 그곳에 그의 딸 선덕여왕이 묻혀 있다.
진평왕릉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두 부녀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덕만아!”

“예, 아버지.”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말이야.
네가 김춘추, 김유신 같은 인재를 중용하여
통일의 기반을 마련해 비로소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너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선덕여왕’ 방영 이후 날 찾는 사람도 부쩍 늘었단다.
난 지금 열 아들 부럽지 않단다.”

“아버지도 참….”

진평왕릉에서 명활성까지 이어지는 약 2km 거리의 선덕여왕길을 맨발로 자박자박 걸어본다.
언제 와도 또 둘러보고 싶은 진평왕릉은 나의 소중한 보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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