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本 경주
히스토리 경주

삼국사기 속 ‘설씨녀전’
신라인의 사랑이야기

이채경 학예연구관(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설씨녀는 신라 왕경 율리(栗里, 밤나무골, 현 경주시 율동)의 일반 백성 집 딸이다. 비록 지체가 낮은 가문에 세력이 없는 집안이었으나, 얼굴 빛은 바르고 단정하였고, 뜻과 행실은 가지런히 닦였다. 보는 사람마다 그 아름다움을 흠모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진평왕(眞平王) 때에 설씨녀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正谷, 지금의 경남 산청군 산청읍 정곡리이다. 당시 백제와의 접경지역이었다.)에 외적을 막으러 갈 순서가 되었다. 설씨녀는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이 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떠나보낼 수 없었고, 또 여자의 몸이어서 대신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만 스스로 근심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사량부(지금의 경주시 탑동, 배동, 내남면, 울주군 두동면, 두서면 일대이다.) 젊은이 가실(嘉實)은 비록 매우 가난하여 보잘 것이 없었으나, 그 부모의 뜻을 받들어 자기 뜻을 기르는 곧은 남자였다. 일찍부터 아름다운 설씨녀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설씨녀가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야 함을 걱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설씨녀에게 가서 말하기를,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부터 뜻과 기개를 자부하여 왔습니다. 변변찮은 몸으로 아버님의 군역을 대신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설씨녀가 매우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아버지가 가실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늙은이가 가는 것을 대신하고자 한다고 하니, 기쁘면서도 걱정이 듦을 이길 수 없네.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못생겼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원하건대 어린 딸을 주어 아내가 되어 섬기게 하겠네.”라고 하였다. 가실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라지 않았는데 이는 원하던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가 설씨에게 혼인할 날을 물으니 설씨녀가 말하기를 “혼인은 인간의 중요한 도리이므로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군역에 나아갔다가 교대하고 돌아오시면 그런 후에 좋은 날을 잡아 혼례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거울을 가져다 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쪽씩 잡고 말하기를 “이것을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그것을 합쳐 봅시다.”라고 하였다. 가실은 말 한 필을 갖고 있었는데 설씨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걸어서 가니 기를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말을 두고 가니 이를 두고 쓰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물러나 떠났다.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하도록 하지 못하여 가실은 6년을 머물고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이미 지났구나. 다른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설씨녀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가실이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렸기 때문에 굳게 가실과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은 이를 믿었기 때문에 군대에 갔고 몇 년이 되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괴롭고 고생이 심할 것이고, 하물며 적지에 가까이 있어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고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두려워할 것인데 신의를 저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끝까지 감히 아버지의 명을 따를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늙어서 정신이 흐릿하였고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이 없었으므로 억지로 그를 시집보내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미 정한 날이 되어 그 사람을 불러들였으나 설씨녀는 굳게 거절하였다. 몰래 도망을 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보면서 크게 한숨 쉬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가실이 교대하여 왔다. 몸은 뼈가 드러나도록 야위어서 파리하였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곧장 설씨녀 앞에 와서 깨진 거울을 설씨녀에게 던지니 설씨녀가 그것을 주워 들고 큰 소리로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은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마침내 다른 날을 약속하여 서로 만나 가실과 함께 해로하였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라시대 당시에도 당연히 군역의 의무가 있었고 징집대상은 정남(丁男: 15세~60세 남자)이었으며, 복무기간은 3년인데 국경의 사정에 따라 6년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대리복무도 허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6년을 복무한 것은 대리복무한 3년에다가 자신의 의무인 3년을 합쳐서 한꺼번에 복무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진평왕 때는 신라와 백제와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가실은 설씨녀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대에 갔고, 설씨녀는 혼인을 약속한 가실을 기약한 3년이 지나고 6년이 되도록 변치 않고 끈질기게 기다려서 마침내 함께 해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경주 이색체험‘바스락 바스락’ 예쁜 소리
경주의 서점을 가다
경주 A to Z경주를 경주답게 News Top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