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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시장실

태극기의 의미와 유래

경주시장 주낙영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피아를 식별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내적으로는 나라의 정체성과 국민적 통합성을 드높이는 역할도 한다.

열린 시장실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무운장구 태극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Taegeukgi

국기의 형태는 주로 직사각형에 가로 또는 세로 줄무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줄의 수와 색깔에 따라 삼색기, 사색기 등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에 다양한 문양이 추가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십자문양, 이슬람 국가들의 초승달 문양, 구 공산권 국가들의 낫과 망치 문양 등이다. 별을 많이 넣기도 하는데 미국의 성조기는 50개 주를 나타내는 50개의 별이, 중국의 오성홍기는 공산당을 상징하는 큰 별과 4개의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4개의 별이 왼쪽 상단에 그려져 있다. 브라질 국기는 수도 브라질리아와 26개의 주를 상징하는 27개의 별이 중앙에 천체처럼 그려져 있다. 그 나라의 대표적인 동식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단풍나무 잎이 그려진 캐나다 국기, 콘도르가 그려진 에콰도르 국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들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리 차원이 높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은 느낌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태극기는 매우 심오하고도 고차원적인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乾坤坎離)의 4괘(卦)로 구성되어 있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 문양은 음(陰)과 양(陽)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생성하고 발전하는 음양오행의 원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주역(周易)의 8괘 나아가 64괘를 대표하는 것으로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로 형상화한 것이다. 건·곤·감·리는 자연적 상징의 의미로 보면 각각 하늘, 땅, 물, 불의 4요소를 나타내고, 성질로 보면 강건, 유순, 습함, 밝음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군주, 백성, 도적, 무기요, 절기로 보면 각각 초겨울, 초가을, 한겨울, 한여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처럼 4괘는 만물만사의 부단한 운행과 무수한 물형과 의미들, 그리고 수많은 자연적, 정치적, 사회적 관계를 상징한다.
이처럼 태극기는 주역의 태극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의 이상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심오한 역학적 의미가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선조들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상식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1883년(고종 20) 1월 27일 태극기가 대내적으로 처음 공포되었을 때 조선 백성들은 기꺼이 이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태극기는 누가 언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동안 1882년 9월에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갈 때 고종의 명을 받아 메이지마루(明治丸)호 선상에서 만들어 고베의 숙소에 처음 내걸어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 정부의 공식문서에서도 최근까지 그렇게 기술되어 있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왜 천하의 매국노 박영효냐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만고의 역적이자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한 1급 친일 매국노 박영효가 태극기를 창제했다니 기분 나쁜 정도를 지나 역사의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널리 알려진 박영효의 태극기 창제설은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 2004년 1월경 한국의 고서점 주인 윤형원 씨가 미국 해군성 항해국이 1882년 7월에 발행한 『해양제국의 국기들(Flags of Maritime Nations)』에서 4괘 태극기 도면 그림을 발견했다. 그리고 2018년 8월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미국측 전권특사였던 로버트 슈펠트(Robert Shufeldt) 제독의 문서함에서 당시 조인식에 사용되었던 태극기의 모사본을 찾아냈다. 이로써 미 해군성의 책자에 실린 태극기 도면은 1882년 5월 22일 조미수교 시 성조기와 마주해 걸었던 국기를 모사하여 수록한 것임이 확인됨으로써 박영효의 창제설은 완전한 허구임이 증명되었다. 즉,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882년 5월 22일 조약 조인식이 열린 스와타라호 선상으로서 박영효가 코베에 도착하여 숙소에 걸었다는 9월 25일보다 무려 4개월이나 앞서는 것이다.
그럼 태극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사료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종의 명에 의해 조선정부가 준비한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고종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열강과의 교섭 과정에서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국기 창제를 고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당시 조선을 계속 속방으로 묶어두려는 청의 눈치를 살피느라 청국관리들 몰래 극비리에 이를 추진하였다. 또 하나의 의문, 박영효는 왜 <기무처에 보내는 서신>에서 자기가 4괘 태극기를 처음 창제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였을까? 황태연 동국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일제시대 내내 친일행각을 벌이던 박영효는 훗날 조국이 광복되었을 때 후환을 두려워하여 문서를 조작, 날조하였다. 또 다른 매국노 윤치호가 해방이 닥치자 애국가 가사를 자기가 지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던 것처럼. 조국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꾀했던 수많은 변절 지식분자들의 뻔뻔한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올해는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노골화했던 갑진왜란이 일어난 지 120주년 되는 해다. 이 갑진왜란은 이듬해 을사늑약에 이어 6년 후 조선을 병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저항하여 얼마나 많은 대한제국의 의병들과 독립군들이 무참히 죽어갔던가. 그리고 3.1운동 때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던가. 우리의 선조들이 끌어안고 싸웠던 나라의 상징 태극기의 의미와 유래를 되새겨보는 까닭이다.

나의 경주경주에서 보낸 2년
박인 독자님
포커스 경주2023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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